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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황명 시인 / 백두파(白頭波)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9.

황명 시인 / 백두파(白頭波)

 

 

그것은

순수(純粹)라는 이름으로 추켜올린

교만한 예술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은 어느

거칠은 화가의

손바닥 같은 것.

 

영원(永遠)을 치닫는

긴 여로(旅路)에서

스스로의 콧등을 할퀴고

나비 같은 몸매로

자맥질하는 저

무희(舞姬)의 뒷발꿈치.

 

밤이여

이제는 나를 더

흔들지 말라.

상황은 의식 밖에 있는

열 두 굽이 물결인 것을.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황명 시인 / 분수(噴水) 1

 

 

 

오죽하면 하늘을 우러러 스스로의

노여움을 자제(自制)하는 저

묵시(?示)의 입김은

얼마나 거룩한

종교 같은 것이라야 할까.

 

 

일찍 하늘로 승화(昇華)하지 못한

먼 태고(太古)적 우리

어버이들의 눈물이 마침내

영원과 맞서는 자리에

찬란한 무지개를 피우듯

아기찬 우리들의

의욕으로 되살아 오르는가.

 

 

언제고 한번은

끝없는 강물을 이루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러 오던

하늘이여,

해여,

달이여,

별이여,

지금은 모두가

나에게로 어울려 드는

이 창업(創業)의 경이(驚異) 같은

아, 청청히 나의 가슴을

굽이치는 강물아.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황명 시인 / 분수(噴水) 4

 

 

지금은 또 한번

결의(決意)를 가다듬어야 한다.

 

옛날의 아쉬운 언덕에서

철없이 뒹굴어 떨어져 간

나날들.

 

가고 아니 오는 것은

할아버지의 상여 같은 강물

 

―그 뒤에서 복재기 노릇을 하는

  나, 나는 흐르고―

 

1950년 6월을 아는 사람은

쳐들고 있던 고개를 숙이고

 

어쩌면 살륙의 광장 같은 지구로 하여

잊을 수 없는 죄업을

소리소리 하늘로 고발하는 저

목메인 절창을 들어라.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황명(黃命.1931.11.20∼1998.10.2) 시인

창녕군 영산면 출생. 본명 황복동. 1955년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195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분수>가 당선되었다. 휘문고교 교사, 1972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문인협회 이사장 역임. 국민훈장석류장 수상. 2000년 3월 4일 시비(詩碑)가 경기 부천시 중앙공원에서 제막됐다. 문화훈장 석류장(1992), 자랑스러운 성남인상(1995), 보관문화훈장(1996) 등 수상. 1999  유고시집 <분수와 나목>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