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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문병란 시인 / 겨울 산촌(山村)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9.

문병란 시인 / 겨울 산촌(山村)

 

 

사방이 막혀버렸다, 깊은 겨울

버스도 들어오지 않았다, 차라리 막혀버려다오.

 

겨울은 내 고향의 구들목에

미신이 들끓는 달,

지글지글 끓는 사랑방 아랫목에서

머슴들의 사랑이 무르익어가는 달,

화투장 위에도 밤새도록 흰 눈이여 쌓여다오.

 

겨울 산촌(山村)은 막힌 대로가 좋아

눈은 이틀째 자꾸만 내리고

자꾸만 내리고

신문도 배달부도 안 오는 깊은 겨울.

 

도시에서 실려오는 편지도

새마을 잡지도 오지 말아다오

차라리 신문이여 오지 말아다오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유행가여 들리지 말아다오

지불명령을 가지고 오는 우체부 아저씨여 오지 말아다오.

 

눈 내리는 소리만 들리게 하고, 차라리

호롱불 가에서 심청전을 읽으며 울게 해다오

춘향이와 이도령의 서러운 이별을 함께 울게 해다오.

 

이틀째 이틀째 내리는 눈, 심란하게 심란하게 내리는 눈,

과부네 집 창가에 바스락거리는 눈,

눈 녹으면 어이할거나, 얼음 풀리면 어이할거나.

 

읍내로 나가는 고개도 막히고, 학교로 나가는 앞길도 막히고

간이역으로 나가는 윗길도 막히고,

막힌 땅에서 농부가 울어, 막힌 가슴으로

고향이 울어.

 

차라리 모두 다 막혀버려다오

차라리 모두 다 막혀버려다오.

 

죽순밭에서, 인학사, 1977

 

 


 

 

문병란 시인 / 고무신

 

 

어느 노동자의 발바닥 밑에서

40대 여인의 금간 발바닥 밑에서

이제는 닳아지고 구멍 뚫린 고무신,

이른 새벽 도시의 뒷골목 위에서나

저무는 변두리의 진흙밭 속에서나

그들은 쉬지 않고 아득히 걷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쉬임 없이 걸어온 운명,

즌데만 딛고 온 고단한 발길 따라

캄캄한 어둠도 밟고 가고

끝없이 펼쳐진 노동의 아침,

타오르는 불길도 밟고 간다.

 

아득한 시간의 언덕 너머 펼쳐진

고향의 잃어진 논둑길을 걸어서

가물거리는 호롱불을 찾아가는 고무신,

두메산골 머슴의 발바닥 밑에서도

흑산도 뱃놈의 발바닥 밑에서도

뿌듯한 중량의 눈물을 안고

그들은 어디서나 돌아오고 있다.

 

영산포 어물장 법성포 소금장

이 장 저 장 굴러다니다

영산강 황토물 속에 처박혀

멀뚱멀뚱 두 눈 부릅뜨고

한많은 가슴 썩지 못하는 고무신.

 

주인의 정든 발에 신기었을

또 하나의 고무신을 생각하며

그 주인의 발가락 사이

솔솔 풍기는 고린내를 생각하며

송송 구멍 뚫린 가슴 안고

빈 달빛에 젖는 양로원 뜨락.

 

오늘은 엿장수의 엿판에 실려

보이지 않는 땅으로 팔려간다.

뒷골목 쓰레기통에 누워 낮잠을 자고

허름한 변두리의 술집에서 술을 마신다.

 

군화가 밟고 간 아스팔트 위에서

윤나는 구두가 밟고 간 아스팔트 위에서

모진 학대 속에 짓밟힌 고무신,

기나긴 형벌의 불볕 속을

오늘은 절뚝이며 절뚝이며 쫓겨간다.

 

선거때 야음을 타고

구장 반장 손을 거쳐

살금살금 박서방 김서방을 찾아간

10문짜리 검정고무신

 

민주주의의 유권이 되었던 자랑도

알뜰한 관록도 사라진 채

오늘은 구멍 뚫린 밑창으로

영산강 황토물이나 마시고 있구나.

 

머슴의 발바닥 밑에서

식모살이 순이의 발바닥 밑에서

뜨겁게 뜨겁게 닳아진 세월,

돌멩이도 걷어차며 깡통도 걷어차며

사무친 설움 날선 분노 안으로 삭이고

변두리로 변두리로 쫓겨온 고무신.

 

번뜩이는 죽창(竹槍)에 구멍난 가슴 안고

장성 갈재 넘어가던 짚신,

그 발자국마다 핏물이 고이는데

오늘은 구멍 뚫린 고무신이 쫓겨난다.

 

썩어도 썩어도 썩지 못하는 한많은 가슴,

땅 속 깊이 파묻혀도

뻘밭 속에 거꾸로 처박혀도

한사코 두 눈 부릅뜨고

영영 죽지 못하는 한(恨)

여기 벌떼같이 살아나는 아우성이 있다.

 

죽순밭에서, 인학사, 1977

 

 


 

문병란(文炳蘭, 1935년~2015년) 시인

전라남도 화순 출생. 호는 서은(瑞隱). 1961년에 조선대학교 문학과를 졸업. 1962년 《현대문학》에 김현승 시인이 3회 추천 완료하여 문단에 나옴. 1988년에 조선대학교 국문과 조교수에 임용되었다가 2000년에 교수가 되었으며, 현재 명예교수.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1996년 5.18기념재단 이사를 역임했다. 1979년 전남문학상을 시작으로 하여 요산문학상, 금호예술상, 광주문화예술상, 한림문학상, 박인환 시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