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 / 피는 꽃
사발에 냉수도 부셔버리고 빈 그릇만 남겨요. 아주 엷은 구름하고도 이별해 버려요. 햇볕에 새붉은 꽃 피어나지만 이것은 그저 한낱 당신 눈의 그늘일 뿐, 두 번짼가 세 번째로 접히는 그늘일 뿐, 당신 눈의 작디 작은 그늘일 뿐이어니…….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학
천년 맺힌 시름을 출렁이는 물살도 없이 고운 강물이 흐르듯 학이 날은다
천년을 보던 눈이 천년을 파다거리던 날개가 또 한 번 천애(天涯)에 맞부딪노나
산덩어리 같아야 할 분노가 초목도 울려야 할 설움이 저리도 조용히 흐르는구나
보라, 옥빛, 꼭두선이, 보라, 옥빛, 꼭두선이, 누이의 수틀을 보듯 세상은 보자
누이의 어깨 너머 누이의 수(繡)틀 속의 꽃밭을 보듯 세상은 보자
울음은 해일 아니면 크나 큰 제사와 같이
춤이야 어느 땐들 골라 못 추랴 멍멍히 잦은 목을 제 쭉지에 묻을 바에야 춤이야 어느 술참 땐들 골라 못 추랴
긴머리 자진머리 일렁이는 구름 속을 저, 울음으로도 춤으로도 참음으로도 다하지 못한 것이 어루만지듯 어루만지듯 저승 곁을 날은다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서정주 시인 / 한 발 고여 해오리
이동백이 새타령에 `월명(月明) 추수(秋水) 찬 모래 한 발 고여 해오리' 있지?
세상이 두루두루 늦가을 찬물이면 두 발 다 시리게스리 적시고 있어서야 쓰는가?
한 발은 치켜들어 덜 시리게 고였다가 물 속에 시린 발이 아주 저려 오거든 바꾸어서 물에 넣고 저린 발 또 고여야지.
아무렴 아무렴 그렇고말고, 슬기가 별 슬기가 또 어디 있나?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
서정주 시인 / 한양호일(漢陽好日)
열대여섯 살짜리 소년이 작약꽃을 한아름 자전거 뒤에다 실어 끌고 이조(李朝)의 낡은 먹기와집 골목을 지나가면서 연계(軟鷄) 같은 소리로 꽃 사라고 외치오. 세계에서 제일 잘 물들여진 옥색(玉色)의 공기 속에 그 소리의 맥(脈)이 담기오. 뒤에서 꽃을 찾는 아주머니가 백지의 창을 열고 꽃장수 꽃장수 일루 와요 불러도 통 못 알아듣고 꽃 사려 꽃 사려 소년은 그냥 열심히 외치고만 가오. 먹기와집들이 다 끝나는 언덕 위에 올라서선 작약꽃 앞자리에 냉큼 올라타서 방울을 울리며 내달아가오.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할머니의 인상
할머니는 단군 적 박달나무 신발을 신고 두루미 우는 손톱들을 가졌었나니……. 쑥 같고 마늘 같고 수숫대 같은 숨쉬는 걸 조금 때 가르쳐 준 할머니는…….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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