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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서정주 시인 / 피는 꽃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7.

 서정주 시인 / 피는 꽃

 

 

사발에 냉수도

부셔버리고

빈 그릇만 남겨요.

아주 엷은 구름하고도 이별해 버려요.

햇볕에 새붉은 꽃 피어나지만

이것은 그저 한낱 당신 눈의 그늘일 뿐,

두 번짼가 세 번째로 접히는 그늘일 뿐,

당신 눈의 작디 작은 그늘일 뿐이어니…….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학

 

 

천년 맺힌 시름을

출렁이는 물살도 없이

고운 강물이 흐르듯

학이 날은다

 

천년을 보던 눈이

천년을 파다거리던 날개가

또 한 번 천애(天涯)에 맞부딪노나

 

산덩어리 같아야 할 분노가

초목도 울려야 할 설움이

저리도 조용히 흐르는구나

 

보라, 옥빛, 꼭두선이,

보라, 옥빛, 꼭두선이,

누이의 수틀을 보듯

세상은 보자

 

누이의 어깨 너머

누이의 수(繡)틀 속의 꽃밭을 보듯

세상은 보자

 

울음은 해일

아니면 크나 큰 제사와 같이

 

춤이야 어느 땐들 골라 못 추랴

멍멍히 잦은 목을 제 쭉지에 묻을 바에야

춤이야 어느 술참 땐들 골라 못 추랴

 

긴머리 자진머리 일렁이는 구름 속을

저, 울음으로도 춤으로도 참음으로도 다하지 못한 것이

어루만지듯 어루만지듯

저승 곁을 날은다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서정주 시인 / 한 발 고여 해오리

 

 

이동백이 새타령에

`월명(月明) 추수(秋水) 찬 모래

한 발 고여 해오리' 있지?

 

세상이 두루두루 늦가을 찬물이면

두 발 다 시리게스리 적시고 있어서야 쓰는가?

 

한 발은 치켜들어 덜 시리게 고였다가

물 속에 시린 발이 아주 저려 오거든

바꾸어서 물에 넣고 저린 발 또 고여야지.

 

아무렴 아무렴 그렇고말고,

슬기가 별 슬기가 또 어디 있나?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

 

 


 

 

서정주 시인 / 한양호일(漢陽好日)

 

 

열대여섯 살짜리 소년이 작약꽃을 한아름 자전거 뒤에다 실어 끌고 이조(李朝)의 낡은 먹기와집 골목을 지나가면서 연계(軟鷄) 같은 소리로 꽃 사라고 외치오. 세계에서 제일 잘 물들여진 옥색(玉色)의 공기 속에 그 소리의 맥(脈)이 담기오. 뒤에서 꽃을 찾는 아주머니가 백지의 창을 열고 꽃장수 꽃장수 일루 와요 불러도 통 못 알아듣고 꽃 사려 꽃 사려 소년은 그냥 열심히 외치고만 가오. 먹기와집들이 다 끝나는 언덕 위에 올라서선 작약꽃 앞자리에 냉큼 올라타서 방울을 울리며 내달아가오.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할머니의 인상

 

 

할머니는 단군 적 박달나무 신발을 신고

두루미 우는 손톱들을 가졌었나니…….

쑥 같고 마늘 같고 수숫대 같은

숨쉬는 걸 조금 때 가르쳐 준 할머니는…….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서정주[徐廷柱,1915.5.18 ~ 2000.12.24] 시인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중앙고보와 중앙 불교학원에서 수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귀촉도(歸蜀途)』(1948), 『신라초(新羅抄)』(1961), 『동천(冬天)』(1969), 『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 『산시』(1991) 등 다수의 시집과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 간행. 조선청년문학가협회·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동국대 교수 역임. 5·16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의 다수의 賞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