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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서정주 시인 / 조국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5.

 서정주 시인 / 조국

 

 

누군가

한 그릇의 옛날 냉수를

조심조심 떠받들고

걸어오고 계시는 이.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받쳐 들고 오시는 이.

 

구름 머흐는 육자배기의 영원을,

세계의 가장 큰 고요 속을,

차라리 끼니도 아니 드시고

끊임없이 떠받들고 걸어오고만 계시는 이.

 

누군가.

이미 형상도 없는 하늘 속 텔레비로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밤낮으로 쉬임없이 받쳐 들고 오시는 이.

 

누군가

한 그릇의 옛날 냉수를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받쳐들고 오시는 이.

 

조국아.

네 그 모양 아니었더면

내 벌써 그 마지막 피리를

길가에 팽개치고 말았으리라.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서정주 시인 / 진주 가서

 

 

백일홍 꽃망울만한 백일홍 꽃빛 구름이

하늘에 가 열려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1․4후퇴 때 나는 진주 가서 보았다.

 

암수의 느티나무가 오백년을 의(誼) 안 상하고

사는 것을 보았는가.

 

1․4후퇴 때 나는 진주 가서 보았다.

 

기생이 청강(淸江)의 신이 되어 정말로 살고 계시는 것을

보았는가.

 

1․4후퇴 때 나는 진주 가서 보았다.

 

그의 가진 것에다 살을 비비면 병이 낫는다고,

아직도 귀때기가 새파란 새댁이 논개의 강(江)물에다 두 손을 적시고 있는 것을

시인 설창수가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어서 보았다.

 

신라초, 정음사, 1961

 

 


 

 

서정주 시인 / 찬술

 

 

밤 새워 긴 글 쓰다 지친 아침은

찬술로 목을 축여 겨우 이어 가나니

한 수에 오만 원짜리 회갑시 써 달라던

그 부잣집 마누라 새삼스레 그리워라.

그런 마누라 한 열대여섯 명 줄지어 왔으면 싶어라.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

 

 


 

 

서정주 시인 / 추석

 

 

대춧물 들이는 햇볕에

눈 맞추어

두었던 눈썹.

 

고향 떠나올 때

가슴에 끄리고 왔던 눈썹.

 

열두 자루 비수 밑에

숨기어져

살던 눈썹.

 

비수들 다 녹슬어

시궁창에

버리던 날,

 

삼시 세끼 굶은 날에

역력하던

너의 눈썹.

 

안심찮아

먼 산 바위

박아 넣어 두었더니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추석이라

밝은 달아

 

너 어느 골방에서

한잠도 안 자고 앉았다가

그 눈썹 꺼내 들고

기왓장 넘어오는고.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추일미음(秋日微吟)

 

 

울타릿가 감들은 떫은 물이 들었고

맨드라미 촉규(蜀葵)는 붉은 물이 들었다만

나는 이 가을날 무슨 물이 들었는고.

 

아내 박은 뜰 안에 큰 주먹처럼 놓이고

타래 박은 뜰 밖에 작은 주먹처럼 놓였다만

내 주먹은 어디다가 놓으면 좋을꼬.

 

신라초, 정음사, 1961

 

 


 

서정주[徐廷柱,1915.5.18 ~ 2000.12.24] 시인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중앙고보와 중앙 불교학원에서 수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귀촉도(歸蜀途)』(1948), 『신라초(新羅抄)』(1961), 『동천(冬天)』(1969), 『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 『산시』(1991) 등 다수의 시집과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 간행. 조선청년문학가협회·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동국대 교수 역임. 5·16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의 다수의 賞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