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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고원 시인 / 오후의 미소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5.

고원 시인 / 오후의 미소

 

 

―`아폴로'의 피신(避身)―

―`피에로'-

―`카이로'-

 

병사들이 손을 흔들며

지중해로 떠나는 저녁때부터

부슬비는 내리기 시작했고,

실내악처럼 지금

비둘기가 내내 비를 맞는다.

 

짙은 회색에 젖은 음향과

짙은 회색에 젖은

오후의 미소.

과일이 향긋한 식탁에서는

사이프러스 청년이

칼을 몹시 조심하고 있었다.

   "오늘 회의는 끝났습니다."

 

비둘기가 내내 비를 맞는다.

개가 짖지 않고 종이 울린다.

외로움이나 그리움보다

더 멀지 못한 종이 울린다.

   "조국은 조용합니까?"

실내악 속으로

밤이 다가온다.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 정신사, 1960

 

 


 

 

고원 시인 / 자색(紫色)의 태양

 

 

그러면 천상

헤져야 했다.

종내 서먹서먹한 그림자들

`또 만나요!' 없이

서둘러야 했다.

 

기―다랗게 땅바닥만 굽어 보고

눈부신 어둠을 이삭 줍는 동안

멍든 태양의

빛깔을 잊었더구나.

 

얼어 붙을 얼어 붙을

뒷골목의 체온이 있었다.

 

그러면 천상

만나야 했다.

눈감고 가슴으로만

마구 타 버리게

만나야 했다.

 

다시 한꺼풀 파고들

자색의 태양이었다.

 

이율의 항변, 시작사, 1954

 

 


 

 

고원 시인 / 제백(第百)의 기(旗)

 

 

눈에 보이는 소리,

소리를 내는 빛이 있다.

  그와 같이 역사는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 새역사의 한모퉁이에서

시간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시간에

제백(第百)의 기(旗)가 날리고 있다.

 

억울한 젊은 죽음의 영상.

살인범이 제대로 살아 있는 곁에서

깃발은 피의 변한 색채를 가슴에 뿌린다.

 

시체를 묻는 마음 가운데,

꽃을 꽂는 마음 가운데,

술을 붓는 손으로

불을 지르는 손으로

우리는 너를 안고 있다.

 

어제를 거부한

오늘을 또한 거절하며,

제백의 기는

이제 벅찬 호흡을 가다듬는다.

 

지금은 외로운

진실의 파문.

태양을 머금은

바다의 숨결인가.

 

눈에 보이는 소리,

소리를 내는 빛으로,

제백의 기는

`아방가르드'의 하늘에

휘날리고 있다.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 정신사, 1960

 

 


 

고원(高遠.1925∼2008.1.20) 시인

본명 고성원(高性遠). 충북 영동 출생. 혜화전문(현 동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영국 런던대, 퀸메리대 수료. 중고등학교 교사, 통신사ㆍ신문사 기자 등에 종사하고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국원으로 일한 적도 있다. 한국시인협회 사무간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사무국장 역임.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 역임. 1954년 시지(詩誌) [시작(詩作)]을 창간, 주재, 1955년까지 6집을 발간하여 1950년대 기단의 일각을 빛냈다.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이민영, 장호와 더불어 3인 시집 <시간표 없는 정거장>에 <연착된 막차>를 발표한 이래 많은 시집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