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 / 우리 데이트는
햇볕 아늑하고 영원도 잘 보이는 날 우리 데이트는 인젠 이렇게 해야지―
내가 어느 절간에 가 불공을 하면 그대는 그 어디 돌탑에 기대어 한 낮잠 잘 주무시고,
그대 좋은 낮잠의 상으로 나는 내 금팔찌나 한 짝 그대 자는 가슴 위에 벗어서 얹어 놓고,
그리곤 그대 깨어나거든 시원한 바다나 하나 우리 둘 사이에 두어야지.
―우리 데이트는 인젠 이렇게 하지. 햇볕 아늑하고 영원도 잘 보이는 날.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서정주 시인 / 이오니아 바닷가에서 부제: 코린토스 장에서 산 갈피리를 불고 있으니
무성한 나무 그늘에서 소 세 마리 데불고 발가벗은 알몸으로 피리를 불고 섰는 목신(牧神) 팬이 하라는 대로 코린토스 장에서 나도 그 피리 하나 사 들고 이오니아 바닷가에 가 불고 서 있었더니,
그 거칠던 해신(海神) 포세이돈이 그 소리를 알아듣고 바다에서 솟아올라 귀띔해 주는 말이 `사실은 나도 요즘은 세월이 달라져서 그것이나 불고 소일하고 지낸다'면서 `듣고 싶건 나 따라서 들어와 봐라'더군.
그래서 어렸을 때 배운 개구리 헤엄으로 머리까지 몽땅 바다에 빠져들었더니 곡조는 뭍의 것과 좀 다르지만서두 피리 소린 틀림없이 그 피리 소린데 옛 희랍이 만들어 낸 모든 것 중에서 이것 하나 철저힌 간절히 살아 바닷속 깊이까지 아직 스며 있더군.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정주 시인 / 인도의 여인
인도의 여자더러는 시간을 묻지 마라. 낮인가 밤인가 그것만 묻고, 오늘인가 어젠가 내일인가도 아예 아예 묻지를 마라.
낮이때거든 잘 피어 보이는 꽃을, 밤이거들랑 잘 숨어서 안 보이는 꽃을, 자세히 자세히 물어 보아라. 그것만을 자세히 소근거릴 것이다.
`너이 값이 얼마치냐?'고 해도 그런 것은 더구나 그네들은 모른다. 플러스 무한정이나 마이너스 무한정이나 주먹구구로 거의 거의 마찬가지로 안다. 가령 어느 외국의 잡팽이 사내가 인도 창녀를 하나 데리고 자고 나서 `얼마 주랴?'고 물어 보아도 그런 액수조차도 그네는 깡그리 모를 것이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정주 시인 / 인연설화조(因緣說話調)
언제던가 나는 한 송이의 모란꽃으로 피어 있었다. 한 예쁜 처녀가 옆에서 나와 마주보고 살았다.
그 뒤 어느 날 모란꽃잎은 떨어져 누워 메말라서 재가 되었다가 곧 흙하고 한세상이 되었다. 그게 이내 처녀도 죽어서 그 언저리의 흙 속에 묻혔다. 그것이 또 억수의 비가 와서 모란꽃이 사위어 된 흙 위의 재들을 강물로 쓸고 내려가던 때, 땅 속에 괴어 있던 처녀의 피도 따라서 강으로 흘렀다.
그래, 그 모란꽃 사윈 재가 강물에서 어느 물고기의 배로 들어가 그 혈육에 자리했을 때, 처녀의 피가 흘러가서 된 물살은 그 고기 가까이서 출렁이게 되고, 그 고기를, ―그 좋아서 뛰던 고기를 어느 하늘가에 물새가 와 채어 먹은 뒤엔 처녀도 이내 햇볕을 따라 하늘로 날아 올라서 그 새의 날개 곁을 스쳐 다니는 구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새는 그 뒤 또 어느 날 사냥꾼이 쏜 화살에 맞아서, 구름이 아무리 하늘에 머물게 할래야 머물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기에 어쩔 수 없이 구름은 또 소나기 마음을 내 소나기로 쏟아져서 그 죽은 샐 사간 집 뜰에 퍼부었다. 그랬더니, 그 집 두 양주가 그 새고길 저녁상에서 먹어 소화하고 이어 한 영아를 낳아 양육하고 있기에, 뜰에 내린 소나기도 거기 묻힌 모란씨를 불리어 움트게 하고 그 꽃대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 이 마당에 현생(現生)의 모란꽃이 제일 좋게 핀 날, 처녀와 모란꽃은 또 한 번 마주보고 있다만, 허나 벌써 처녀는 모란꽃 속에 있고 전날의 모란꽃이 내가 되어 보고 있는 것이다.
신라초, 정음사, 1961
서정주 시인 / 저무는 황혼
새우마냥 허리 오그리고 뉘엿뉘엿 저무는 황혼을 언덕 너머 딸네 집에 가듯이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
굽이굽이 등 굽은 근심의 언덕 너머 골골이 뻗치는 시름의 잔주름뿐, 저승에 갈 노자도 내겐 없느니
소태같이 쓴 가문 날들을 역구 풀 밑 대어 오던 내 사랑의 보 또랑물 인제는 제대로 흘러라 내버려두고
으시시히 깔리는 머언 산 그리메 홑이불처럼 말아서 덮고 엣비슥히 비끼어 누워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
동천, 민중서관,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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