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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서정주 시인 / 우리 데이트는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4.

 서정주 시인 / 우리 데이트는

 

 

햇볕 아늑하고

영원도 잘 보이는 날

우리 데이트는 인젠 이렇게 해야지―

 

내가 어느 절간에 가 불공을 하면

그대는 그 어디 돌탑에 기대어

한 낮잠 잘 주무시고,

 

그대 좋은 낮잠의 상으로

나는 내 금팔찌나 한 짝

그대 자는 가슴 위에 벗어서 얹어 놓고,

 

그리곤 그대 깨어나거든

시원한 바다나 하나

우리 둘 사이에 두어야지.

 

―우리 데이트는 인젠 이렇게 하지.

햇볕 아늑하고

영원도 잘 보이는 날.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서정주 시인 / 이오니아 바닷가에서

부제: 코린토스 장에서 산 갈피리를 불고 있으니

 

 

무성한 나무 그늘에서 소 세 마리 데불고

발가벗은 알몸으로 피리를 불고 섰는

목신(牧神) 팬이 하라는 대로 코린토스 장에서

나도 그 피리 하나 사 들고

이오니아 바닷가에 가 불고 서 있었더니,

 

그 거칠던 해신(海神) 포세이돈이

그 소리를 알아듣고

바다에서 솟아올라 귀띔해 주는 말이

`사실은 나도 요즘은 세월이 달라져서

그것이나 불고 소일하고 지낸다'면서

`듣고 싶건 나 따라서 들어와 봐라'더군.

 

그래서 어렸을 때 배운 개구리 헤엄으로

머리까지 몽땅 바다에 빠져들었더니

곡조는 뭍의 것과 좀 다르지만서두

피리 소린 틀림없이 그 피리 소린데

옛 희랍이 만들어 낸 모든 것 중에서

이것 하나 철저힌 간절히 살아

바닷속 깊이까지 아직 스며 있더군.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정주 시인 / 인도의 여인

 

 

인도의 여자더러는 시간을 묻지 마라.

낮인가 밤인가 그것만 묻고,

오늘인가 어젠가 내일인가도

아예 아예 묻지를 마라.

 

낮이때거든

잘 피어 보이는 꽃을,

밤이거들랑

잘 숨어서 안 보이는 꽃을,

자세히 자세히 물어 보아라.

그것만을 자세히 소근거릴 것이다.

 

`너이 값이 얼마치냐?'고 해도

그런 것은 더구나 그네들은 모른다.

플러스 무한정이나

마이너스 무한정이나

주먹구구로 거의 거의 마찬가지로 안다.

가령 어느 외국의 잡팽이 사내가

인도 창녀를 하나 데리고 자고 나서

`얼마 주랴?'고 물어 보아도

그런 액수조차도 그네는 깡그리 모를 것이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정주 시인 / 인연설화조(因緣說話調)

 

 

언제던가 나는 한 송이의 모란꽃으로 피어 있었다.

한 예쁜 처녀가 옆에서 나와 마주보고 살았다.

 

그 뒤 어느 날

모란꽃잎은 떨어져 누워

메말라서 재가 되었다가

곧 흙하고 한세상이 되었다.

그게 이내 처녀도 죽어서

그 언저리의 흙 속에 묻혔다.

그것이 또 억수의 비가 와서

모란꽃이 사위어 된 흙 위의 재들을

강물로 쓸고 내려가던 때,

땅 속에 괴어 있던 처녀의 피도 따라서

강으로 흘렀다.

 

그래, 그 모란꽃 사윈 재가 강물에서

어느 물고기의 배로 들어가

그 혈육에 자리했을 때,

처녀의 피가 흘러가서 된 물살은

그 고기 가까이서 출렁이게 되고,

그 고기를, ―그 좋아서 뛰던 고기를

어느 하늘가에 물새가 와 채어 먹은 뒤엔

처녀도 이내 햇볕을 따라 하늘로 날아 올라서

그 새의 날개 곁을 스쳐 다니는 구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새는 그 뒤 또 어느 날

사냥꾼이 쏜 화살에 맞아서,

구름이 아무리 하늘에 머물게 할래야

머물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기에

어쩔 수 없이 구름은 또 소나기 마음을 내 소나기로 쏟아져서

그 죽은 샐 사간 집 뜰에 퍼부었다.

그랬더니, 그 집 두 양주가 그 새고길 저녁상에서 먹어 소화하고

이어 한 영아를 낳아 양육하고 있기에,

뜰에 내린 소나기도

거기 묻힌 모란씨를 불리어 움트게 하고

그 꽃대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 이 마당에

현생(現生)의 모란꽃이 제일 좋게 핀 날,

처녀와 모란꽃은 또 한 번 마주보고 있다만,

허나 벌써 처녀는 모란꽃 속에 있고

전날의 모란꽃이 내가 되어 보고 있는 것이다.

 

신라초, 정음사, 1961

 

 


 

 

서정주 시인 / 저무는 황혼

 

 

새우마냥 허리 오그리고

뉘엿뉘엿 저무는 황혼을

언덕 너머 딸네 집에 가듯이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

 

굽이굽이 등 굽은

근심의 언덕 너머

골골이 뻗치는 시름의 잔주름뿐,

저승에 갈 노자도 내겐 없느니

 

소태같이 쓴 가문 날들을

역구 풀 밑 대어 오던

내 사랑의 보 또랑물

인제는 제대로 흘러라 내버려두고

 

으시시히 깔리는 머언 산 그리메

홑이불처럼 말아서 덮고

엣비슥히 비끼어 누워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徐廷柱,1915.5.18 ~ 2000.12.24] 시인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중앙고보와 중앙 불교학원에서 수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귀촉도(歸蜀途)』(1948), 『신라초(新羅抄)』(1961), 『동천(冬天)』(1969), 『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 『산시』(1991) 등 다수의 시집과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 간행. 조선청년문학가협회·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동국대 교수 역임. 5·16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의 다수의 賞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