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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고원 시인 / 씨앗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4.

고원 시인 / 씨앗

 

 

아늑한 자리

거무스름

점이 돌고,

점이 구르는 대로

도도록 도도록

씨앗의 알이 번진다.

 

점이 번쩍 눈을 뜰 때

물너울에 뛰어드는

산.

씨가 섬을 끌어안고

알은 바다를 들이켠다.

 

나그네 젖은 눈, 혜원출판사, 1989

 

 


 

 

고원 시인 / 안개

 

 

`란든탑' 쯤에서 상륙해 온

네 체질은 꼭

계엄령을 선포한 점령군이다.

감금을 당한 도시의 풍속에는

하늘이 없다.

 

노란 연무 속에 대화가 멈추고

발굽 아래 나뭇잎 소리가 싸늘한 여기,

안개에 싸인 세대와

그 세대에 사는 존재의 증거가 있다.

 

연막 가운데 더 뚜렷한 눈동자는

부다페스트의 독가스라든지

원자운이나 방사능이라든지

그리고 뒷골목 여인들의

절단된 기억과 마주쳐 있다.

 

정치처럼 비약하는

기침

또 기침.

그것은

안개에 싸인 세대의

안전한 발언.

 

하늘이 노랗게 가라앉아

이렇게 도시의 목을 누르는 날,

무중신호(霧中信號)가 안 보이는 창 밑에서

무색한 금붕어는

먼 함대의 꿈이 어수선해

사뭇 벌겋게 열이 오르고.

 

절단된 기억의 로타리에

또 기침이 독을 퍼친다.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 정신사, 1960

 

 


 

 

고원 시인 / 오늘은 멀고

 

 

오늘은 멀고

오늘보다 먼저

내일이 오는 지점에

꽃 냄새를 맡듯이

멎는 마음.

꽃은 없는데.

자리는 비었는데.

 

기억으로 통하는 별들의 맑은 공간을

갑자기 자지러지게 토하는

귀뚜라미 울음이 막아 놓고,

내일의 그림자가 빈 자리에 들어선다.

오늘도 오늘은 멀기만 하다.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 정신사, 1960

 

 


 

고원(高遠.1925∼2008.1.20) 시인

본명 고성원(高性遠). 충북 영동 출생. 혜화전문(현 동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영국 런던대, 퀸메리대 수료. 중고등학교 교사, 통신사ㆍ신문사 기자 등에 종사하고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국원으로 일한 적도 있다. 한국시인협회 사무간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사무국장 역임.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 역임. 1954년 시지(詩誌) [시작(詩作)]을 창간, 주재, 1955년까지 6집을 발간하여 1950년대 기단의 일각을 빛냈다.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이민영, 장호와 더불어 3인 시집 <시간표 없는 정거장>에 <연착된 막차>를 발표한 이래 많은 시집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