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 시인 / 씨앗
아늑한 자리 거무스름 점이 돌고, 점이 구르는 대로 도도록 도도록 씨앗의 알이 번진다.
점이 번쩍 눈을 뜰 때 물너울에 뛰어드는 큰 산. 씨가 섬을 끌어안고 알은 바다를 들이켠다.
나그네 젖은 눈, 혜원출판사, 1989
고원 시인 / 안개
`란든탑' 쯤에서 상륙해 온 네 체질은 꼭 계엄령을 선포한 점령군이다. 감금을 당한 도시의 풍속에는 하늘이 없다.
노란 연무 속에 대화가 멈추고 발굽 아래 나뭇잎 소리가 싸늘한 여기, 안개에 싸인 세대와 그 세대에 사는 존재의 증거가 있다.
연막 가운데 더 뚜렷한 눈동자는 부다페스트의 독가스라든지 원자운이나 방사능이라든지 그리고 뒷골목 여인들의 절단된 기억과 마주쳐 있다.
정치처럼 비약하는 기침 또 기침. 그것은 안개에 싸인 세대의 안전한 발언.
하늘이 노랗게 가라앉아 이렇게 도시의 목을 누르는 날, 무중신호(霧中信號)가 안 보이는 창 밑에서 무색한 금붕어는 먼 함대의 꿈이 어수선해 사뭇 벌겋게 열이 오르고.
절단된 기억의 로타리에 또 기침이 독을 퍼친다.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 정신사, 1960
고원 시인 / 오늘은 멀고
오늘은 멀고 오늘보다 먼저 내일이 오는 지점에 꽃 냄새를 맡듯이 멎는 마음. 꽃은 없는데. 자리는 비었는데.
기억으로 통하는 별들의 맑은 공간을 갑자기 자지러지게 토하는 귀뚜라미 울음이 막아 놓고, 내일의 그림자가 빈 자리에 들어선다. 오늘도 오늘은 멀기만 하다.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 정신사,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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