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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상옥 시인 / 방관자(傍觀者)의 노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3.

김상옥 시인 / 방관자(傍觀者)의 노래

 

 

슬퍼라 가을이여! 서릿발에 서걱일 잎새는커녕, 진구렁 뿌리마저 썩더란 말가. 해마다 이맘 때면 살을 긁던 그날의 그 갈대숲, 한강(漢江)엔 인제 등뼈 굽은 피래미만 꼬리치나니.

 

슬퍼라 가을이여! 차라리 갈대처럼 살갗이라도 긁히고지고. 피가 배이도록 자해(自害)라도 저지르고지고. 사위(四圍)는 둘러 봐야 막막한 무인지경(無人之境). 쉬이 쉬이 손꾸락 입에 대고 하던 말 도로 멈출, 그런 눈짓이라도 만나고지고.

 

슬퍼라 가을이여! 이미 약물에 산천(山川)은 찌들었건만, 지금쯤 애가 탈 금수(錦繡)로운 마무리. 그러나 이런 걸 비로 울릴 한 가닥 심금(心琴)인들 없단 말이냐. 골수에 스민 방관자(傍觀者)의 뉘우침은 곪아 가나니.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 시인 / 백자부(白磁賦)

 

 

찬서리 눈보래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白鶴) 한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 끝에 풍경(風磬)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 틈에 불로초(不老草) 돋아나고

채운(彩雲) 비껴 날고 시내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드노다

 

불 속에 구워 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純朴)하도다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김상옥 시인 / 변신(變身)의 꽃

 

 

아무도 없는 뜨락이었다.

이내 같은 흰 꽃이 피어 있는―

 

가까이 가 보지 않았으나

이미 만개(滿開)한 배꽃일시 분명하다.

 

굳이 배꽃이 아니래도

이내같이 머흐는 꽃이었다.

 

하루는 이 꽃이

느닷없이 하나의 열쇠가 되었다.

꽃이 어찌 열쇠가 되는가?

 

느끼며 기다리며 또

오래 오래 참고 살아 볼 일이다.

 

이 꿈꾸듯 적적(寂寂)한 꽃은

어떤 엉구렁에서도 길을 낸다.

 

때로는 목숨도 잊어버리고

때로는 만남의 문턱으로 드나든다.

 

아무도 없는 뜨락에

호젓이 핀 이 이내 같은 꽃은―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金相沃 1920년-2004년) 시인

시조 시인. 서예가. 서화가. 수필가.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에서 출생. 아호(雅號)는 초정(草汀), 초정(艸丁), 초정(草丁). 일본 오사카 상업학교 중퇴. 1938년에는 김용호, 함윤수 등과 함께 <맥> 동인으로 활동. 시조 《봉선화》를 《문장》지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 1941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엽》으로 등단. 1956년부터 마산고등학교, 부산여자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 1967년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 1980년 제1회 노산문학상. 1989년 제시문화상. 1989년 제시조대상. 1995년 보관문화훈장. 시조집으로 《고원의 곡》, 시집으로 《이단의 시(1949》 《의상》, 동시집으로 《석류꽃》 《꽃속에 묻힌 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