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시인 / 더러는 마주친다
살아가노라면 더러는 마주친다.
세상에는 외나무다리도 많아, 아무리 피하려도 피할 수 없는―
이 다리 위서 너는 뒤따라온 모리꾼으로 마주치고, 또 젊으나 젊은 날 허리 꾸부린 내시(內侍)로도 마주친다.
이 다리 위서 너는 한 오리 미꾸라지로 마주치고, 이미 눈에 불을 끈 늙은 암여우로도 마주친다.
세상(世上)을 사노라면 외나무다리도 많아, 아무리 피하려도 피할 수 없는―
짐짓 꽁무니 감추어도 더러는 마주친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 시인 / 뜨락
자고 나면 이마에 주름살, 자고 나면 뜨락에 흰 라일락.
오지랖이 환해 다들 넓은 오지랖 어쩌자고 환한가?
눈이 부셔 눈을 못 뜨겠네. 구석진 나무 그늘 꾸물거리는 작은 벌레……
이날 이적지 빛을 등진 채 빌붙고 살아 부끄럽네.
자고 나면 몰라 볼 생시. 자고 나면 휘드린 흰 라일락.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 시인 / 묵(墨)을 갈다가
묵(墨)을 갈다가 문득 수몰(水沒)된 무덤을 생각한다. 물 위에 꽃을 뿌리는 이의 마음을 생각한다. 꽃은 물에 떠서 흐르고 마음은 춧돌을 달고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묵(墨)을 갈다가 제삿날 놋그릇 같은 달빛을 생각한다. 그 숲 속, 그 달빛 속 인기척을 생각한다. 엿듣지 마라 엿듣지 마라 용케도 살아 남았으니 이제 들려 줄 것은 벌레의 울음소리밖에 없다.
밤마다 밤이 이슥토록 묵(墨)을 갈다가 벼루에 흥건히 괴는 먹물 먹물은 갑자기 선지빛으로 변한다. 사람은 해치지도 않았는데 지울 수 없는 선지빛은 온 가슴을 번져난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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