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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상옥 시인 / 더러는 마주친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2.

김상옥 시인 / 더러는 마주친다

 

 

살아가노라면

더러는 마주친다.

 

세상에는

외나무다리도 많아,

아무리 피하려도

피할 수 없는―

 

이 다리 위서 너는

뒤따라온 모리꾼으로 마주치고,

또 젊으나 젊은 날

허리 꾸부린 내시(內侍)로도 마주친다.

 

이 다리 위서 너는

한 오리 미꾸라지로 마주치고,

이미 눈에 불을 끈

늙은 암여우로도 마주친다.

 

세상(世上)을 사노라면

외나무다리도 많아,

아무리 피하려도

피할 수 없는―

 

짐짓 꽁무니 감추어도

더러는 마주친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 시인 / 뜨락

 

 

자고 나면

이마에 주름살,

자고 나면

뜨락에 흰 라일락.

 

오지랖이 환해

다들 넓은 오지랖

어쩌자고 환한가?

 

눈이 부셔

눈을 못 뜨겠네.

구석진 나무 그늘

꾸물거리는 작은 벌레……

 

이날 이적지

빛을 등진 채

빌붙고 살아 부끄럽네.

 

자고 나면

몰라 볼 생시.

자고 나면

휘드린 흰 라일락.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 시인 / 묵(墨)을 갈다가

 

 

묵(墨)을 갈다가

문득 수몰(水沒)된 무덤을 생각한다.

물 위에 꽃을 뿌리는 이의 마음을 생각한다.

꽃은 물에 떠서 흐르고

마음은 춧돌을 달고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묵(墨)을 갈다가

제삿날 놋그릇 같은 달빛을 생각한다.

그 숲 속, 그 달빛 속 인기척을 생각한다.

엿듣지 마라 엿듣지 마라

용케도 살아 남았으니

이제 들려 줄 것은 벌레의 울음소리밖에 없다.

 

밤마다 밤이 이슥토록

묵(墨)을 갈다가

벼루에 흥건히 괴는 먹물

먹물은 갑자기 선지빛으로 변한다.

사람은 해치지도 않았는데

지울 수 없는 선지빛은 온 가슴을 번져난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金相沃 1920년-2004년) 시인

시조 시인. 서예가. 서화가. 수필가.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에서 출생. 아호(雅號)는 초정(草汀), 초정(艸丁), 초정(草丁). 일본 오사카 상업학교 중퇴. 1938년에는 김용호, 함윤수 등과 함께 <맥> 동인으로 활동. 시조 《봉선화》를 《문장》지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 1941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엽》으로 등단. 1956년부터 마산고등학교, 부산여자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 1967년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 1980년 제1회 노산문학상. 1989년 제시문화상. 1989년 제시조대상. 1995년 보관문화훈장. 시조집으로 《고원의 곡》, 시집으로 《이단의 시(1949》 《의상》, 동시집으로 《석류꽃》 《꽃속에 묻힌 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