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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상옥 시인 / 낙엽(落葉)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1.

김상옥 시인 / 낙엽(落葉)

 

 

맵고 차운 서리에도 붉게 붉게 타던 마음

한가닥 실바람에 떨어짐도 서럽거늘

여보소 그를 어이려 갈구리로 검나뇨

 

떨어져 구을다가 짓밟힘도 서럽거든

티끌에 묻힌 채로 썩을 것을 어이 보오

타다가 못 다 탄 한을 태워 줄까 하외다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김상옥 시인 / 다보탑(多寶塔)

 

 

불꽃이 이리 튀고 돌조각이 저리 튀고

밤을 낮을 삼아 정 소리가 요란터니

불국사(佛國寺) 백운교(白雲橋) 위에 탑이 솟아오른다.

 

꽃쟁반 팔모 난간(欄干) 층층이 고운 모양!

그의 손 간 데마다 돌옷은 새로 피고

머리엔 푸른 하늘을 받쳐 이고 서 있다.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김상옥 시인 / 대역(代役)의 풀

 

 

허구헌 날, 서울의 구정물을 다 받아 내리던 청계천(淸溪川) 육가(六街). 그 냇바닥을 복개(覆蓋)한 시멘트 위로 고가도로(高架道路)가 놓이고, 그걸 또 받쳐 든 우람한 교각(橋脚). 그 교각(橋脚)의 틈서리에 한 포기 강아지풀이 먼지 묻은 바람을 맞아 나부끼고 있었다. 시멘트 아스팔트로 덮인 서울은 풀씨 하나 묻힐 곳도 없는데, 이 교각(橋脚)의 강아지풀은 온갖 가냘프고 질긴 목숨들을 스스로 대신(代身)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날아와 떨어진 씨앗이던가? 이 강아지풀은 또 좁쌀보다 작은 그의 씨앗을 실오리 같은 줄기 끝, 흰 다갈색(茶褐色) 털 속에 달고 있었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金相沃 1920년-2004년) 시인

시조 시인. 서예가. 서화가. 수필가.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에서 출생. 아호(雅號)는 초정(草汀), 초정(艸丁), 초정(草丁). 일본 오사카 상업학교 중퇴. 1938년에는 김용호, 함윤수 등과 함께 <맥> 동인으로 활동. 시조 《봉선화》를 《문장》지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 1941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엽》으로 등단. 1956년부터 마산고등학교, 부산여자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 1967년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 1980년 제1회 노산문학상. 1989년 제시문화상. 1989년 제시조대상. 1995년 보관문화훈장. 시조집으로 《고원의 곡》, 시집으로 《이단의 시(1949》 《의상》, 동시집으로 《석류꽃》 《꽃속에 묻힌 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