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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고원 시인 / 밤의 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2.

고원 시인 / 밤의 눈

 

 

불을 끄고 잠깐 지나면

어둠을 보는 눈이

어둠에 열리지.

   해가 지고 나면

   밤의 눈이 그렇게 열리는 걸까.

 

밤의 눈을 기다리는

눈을 위해서

밤은

밤에만 들리는 노래로

제 눈을 여는가봐.

 

그래서 밤눈을 열고

밤의 눈을 기다리는 눈 속에

달이 뜨고

별이 나고

그래서 그런 눈과 밤의 눈에서

밤의 가슴 샘물이 솟아나지.

 

밤은

어두울수록 밝은

눈인가봐.

 

정(情), 둥지, 1994

 

 


 

 

고원 시인 / 밤하늘

 

 

밤이 되면 하늘이 으레 딴 세상을 펼칩니다. 그래서 또 기다리던 여행을 합니다. 별다른 준비 없이, 지도도 없이, 우주여행을 하게 됩니다.

 

달이 작아졌다 커졌다 하는 움직임 고대로 땅에서는 마음도 커졌다 작아졌다 움직여집니다. 달이 천천히 지나가는 그대로 가슴에서 달그림자가 따라갑니다. 바다에서도 그렇겠지요. 그러다가 달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여행이 됩니다. 참 신기해요. 들어갔다 나왔다 해요.

 

별도 그래요. 그 많은 별들 가운데 나만 알고 지내는 별이 있어서, 무척 바쁘게 깜빡거리는 고대로 내 맘도 깜박거려요. 다른 별들도 그렇습니다. 하늘의 야회복이 살랑거리고 눈이 하나하나 반짝이는 고대로 마음이 움직이지요. 그러다가 별을 탔다 내렸다 하는 여행이 됩니다.

 

요새는 툭하면 우주 비행을 한다지만 여행이 아니라 겨우 비행만 억지로 하는 셈이겠지요. 비행기를 타보면 달이나 별하고 같이 다니는 여행이 되지 않아요. 참 묘해요. 멀리 떨어져 있어야 우주 여행의 길동무로 만나는 거죠.

 

그러면 밤이 커져요. 달과 별이 다 돌든지, 달만 떴거나 별만 났든지, 여행하는 밤이 쭉쭉 퍼져요. 밤하늘은 큽니다. 다녀볼수록 빨려들어요. 커지는 밤하늘은 지도 없이 떠나는 여행길을 열어줍니다.

 

(情), 둥지, 1994

 

 


 

 

고원 시인 / 사선상(斜線上)의 아리아

 

 

비가 떠난 발자욱에

피사의 사탑이 섰는가?

외줄기로 쏠린 채 몸을 가누는

외로운 각도 너머 하늘이 멀다.

 

아득한 그리움 너무나 높아

어지러운 인파에 사람 하나 없고

소란한 천지에 들리는 소리도

외줄기 사선상의 아리아 뿐이다.

 

속삭이는 불의 꽃, 신흥출판사, 1964

 

 


 

고원(高遠.1925∼2008.1.20) 시인

본명 고성원(高性遠). 충북 영동 출생. 혜화전문(현 동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영국 런던대, 퀸메리대 수료. 중고등학교 교사, 통신사ㆍ신문사 기자 등에 종사하고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국원으로 일한 적도 있다. 한국시인협회 사무간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사무국장 역임.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 역임. 1954년 시지(詩誌) [시작(詩作)]을 창간, 주재, 1955년까지 6집을 발간하여 1950년대 기단의 일각을 빛냈다.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이민영, 장호와 더불어 3인 시집 <시간표 없는 정거장>에 <연착된 막차>를 발표한 이래 많은 시집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