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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서정주 시인 / 신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1.

 서정주 시인 / 신발

 

 

나보고 명절날 신으라고 아버지가 사다 주신 내 신발을 나는 먼 바다로 흘러내리는 개울물에서 장난하고 놀다가 그만 떠내려 보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마 내 이 신발은 벌써 변산(邊山) 콧등 밑의 개 안을 벗어나서 이 세상의 온갖 바닷가를 내 대신 굽이치며 놀아 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어서 그것 대신의 신발을 또 한 켤레 사다가 신겨 주시긴 했습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용품일 뿐, 그 대용품을 신고 명절을 맞이해야 했었습니다.

 

그래, 내가 스스로 내 신발을 사 신게 된 뒤에도 예순이 다 된 지금까지 나는 아직 대용품으로 신발을 사 신는 습관을 고치지 못한 그대로 있습니다.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서정주 시인 /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그 암무당 손때 묻은 징채 보는 것 같군.

그 징과 징채 들고 가던 아홉 살 아이―

암무당의 개와 함께 누룽지에 취직했던

눈썹만이 역력하던 그 하인 아이

보는 것 같군. 보는 것 같군.

내가 삼백 원짜리 시간 강사에도 목이 쉬어

인제는 작파할까 망설이고 있는 날에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서정주 시인 / 아라비아 사막도(圖)

 

 

곧은 칼도 휘어들어 환도(環刀)가 되는,

모래 불타는,

연애도 술도 자비도 용서도 다 처형되는,

아하! 섭씨 50도의 누깔 끓는, 누깔 끓는,

끝없는 사막!

 

이 환장할 어디선가?

남몰래 붙었다가 들킨 남녀가

모가지까지 모래 속에 묻힌 채

그 머리통 돌에 맞아 죽으며 외치는 소리만이

매우 아픈 꽃소리처럼 들릴 뿐,

 

거지 거지 상거지 도둑질한 거지가

그 손목 칼에 잘리며 울부짖는 소리만이

그 다음 꽃소리처럼 불하늘에 꼬슬릴 뿐,

 

알라신의 특별 허가로

아내를 네 명씩이나 끼고 누워 낮잠 자는

오아시스 가장자리나

홍해가의 밀방 속 복인(福人)들만이

비지땀 목욕하는 얄궂은 웃음 웃는다.

 

* 아라비아의 한여름 낮을 가서 겪어 본 이는 잘 알겠지만 섭씨 40도에서 50도가 되는 더위는 왕왕 있다. 그늘에 둔 차도 어쩌다간 쾅! 쾅! 폭발해 터지기도 한다.

 

*여기 법은, 간음 남녀를 하체로부터 그 모가지까지 사막의 모래 속에 묻은 다음에, 그 드러내고 있는 머리통은 처벌자들이 에워싸고 삥 둘러서서 돌들을 던져 쳐죽이도록 하고 있고, 또 남의 물건을 훔친 자들의 손은 그 손목에서 몽땅 싹둑 칼로 잘라 버리기로 되어 있다. 그리고 또 여기 법은 아내를 4명까지는 데리고 사는 것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정주 시인 / 아일랜드의 두 사랑

 

 

1. W.B.예이츠의 사랑

 

한 처녀를 사랑했다가 그 처녀 시집가서

20년 상사병으로 하늘 땅에 뒹굴다가,

그 처녀가 낳은 딸이 그 처녀를 닮아서

50인지 60인지 제 나이도 잊고서

그 딸 이어 사랑하여 그 곁을 맴돌며,

`너도 내 마음을 알아줄 수 없냐?'며

또 채어선 채인 대로 시늠시늠하다가,

저승으로 저승으로 끝도 없는 저승으로

비척비척 발걸음 옮겨 들어가 버리고 만

예이츠! 예이츠!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당신 참 대단히는 사랑하던 시인이여!

애란(愛蘭) 하늘 삼삼한 게 그대 때문이로다.

 

2. 어떤 아일랜드 귀공자의 고백

 

이 천지에서 제일 이쁜 엄마를 나는 제일 좋아했는데요. 엄마는 무엇 때문인지 서방질을 해서 아버지한테 쫓겨나고 나처럼 그네를 사랑하던 아버지는 미치광이 떠돌이가 돼 버렸어요.

 

도깨비 잘 나오는 성과 집들이 달린 몇천만 평의 우리 장원에서 아빠와 엄마는 다 떠나 버리고, 나와 내 형 둘이서 고아로 자랐는데, 상속자인 내 형이 또 무슨 병으로 죽어 버려서, 여기서 아주 사라진 뒤엔, 소르본느의 철학 대학생 나 혼자 여기 남아 사시장천(四時長天) 밤낮으로 앉아서 있었지요.

 

제 눈을 좀 보세요. 쓸쓸했던 게 몇만 길인지요?

 

저는 장가가는 걸 작파하기로 했어요. 내 아버지보다도 더 못 견딜 것 같아서요.

 

그러구 나서는 저는 쓸쓸한 게 어려우면 각국의 여자들을 한 달만큼에 하나씩은 갈아 들이지요. 영국 여자, 불란서 여자, 스페인 여자, 인도 여자, 일본 여자, 또 아프리카의 깜둥이 색시까지도…….

 

그런데 아직도 영 보이지 않아요. 언제나 서방질 안하고, 나와 둘이서만 죽도록까지 사랑할 수 있는 여자가 나타날 것인지…….

 

눈 씻고 볼래야 어디 보여요?

 

* 1978년 6월 16일 나는 아일랜드의 젊은 시인인 내 친구 리처드 라이언 군의 안내로 W.B. 예이츠가 살던 집을 잠시 둘러보면서 그 예이츠의 2대에 걸쳤던 사랑의 이야기를 라이언 군에게서 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날 밤 그의 친구인 어떤 백작 3세의 장원 만찬에 초대되어, 마침 한 일본 여자와 잠시 동거중인 아주 잘 생긴 서러운 얼굴의 장년 총각인 주인을 만나 보고 신비하게 느끼고 있었는데, 뒤에 라이언 군의 말을 들으니, 그는 이 시에 보이는 그대로의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정주[徐廷柱,1915.5.18 ~ 2000.12.24] 시인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중앙고보와 중앙 불교학원에서 수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귀촉도(歸蜀途)』(1948), 『신라초(新羅抄)』(1961), 『동천(冬天)』(1969), 『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 『산시』(1991) 등 다수의 시집과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 간행. 조선청년문학가협회·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동국대 교수 역임. 5·16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의 다수의 賞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