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 / 암스테르담에서 스피노자를 생각하며
암스테르담에 와서 하루만 지내어 보면 하눌님은 여자인 것을, 여자라도 끝없이 뇌쇄(惱殺)하는 제일 이쁜 여자인 것을 할 수 없이 알 수가 있네.
하늘에다가 여러 가지 꽃빛의 여러 빛 별들을 못 두는 대신 이곳에 꽃피워 놓은 억천만 송이의 튜울립꽃들 그것들이 모두 이 미인의 뇌쇄(惱殺)하는 눈초리의 기막히디 기막힌 그늘들인 걸 알 수가 있네.
그리하여 이 뇌쇄(惱殺)에 놀아난 사람들은 죄라도 질라치면 너무나 무식꿍하게는 져서 감옥이라도 보통에 넣으면 뚫고 나오기 때문에 이빨 사나운 상어떼가 우굴거리는 아주 짭찔한 바다 운하가에 바짝 두두룩한 쇠창살을 먹여 가두어 두고,
그리고 우리 직관의 철인 스피노자 같은 사람은 날이 날마다 말간 말간 안경알만 다듬고 앉아서 그 미인과 단둘이서만 조용히 골똘히 눈 맞추고 있었던 것도 알 수가 있네. 얼추는 알 수가 있네.
* 아시다시피 암스테르담은 제2의 베니스라는 별명 그대로, 바다의 운하가 시중의 여러 곳을 누비고 있는데, 그 운하의 수면에 바짝 가까운 여러 곳엔 옛날의 석조의 감옥들이 배치되어 있는 게 보인다. 물론 지금은 이것들을 쓰지는 않지만.
**스피노자(Spinoza, 1632~77):`신은 능식적(能識的) 자연이고, 자연은 소산적(所産的) 자연이므로, 신은 자연이다'라는 범신론(汎神論) 사상을 세운 네덜란드의 철인. 그는 그의 그런 신을 향한 지적인 사랑이 인간 윤리의 극치를 이룬다고 직관했었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정주 시인 / 애기의 꿈
애기의 꿈 속에 나비 한 마리 어디론지 날아가고 햇빛만이 남았다. 그래서 꿈에서 깨어난 애기는 창구멍으로 방바닥에 스며든 햇빛을 눈 대보고, 뺨 대보고, 만져 보고 웃는다. 엄마도 애기같이 이렇다면은 세상은 정말로 좋을 것이다.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
서정주 시인 / 애기의 웃음
애기는 방에 든 햇살을 보고 낄낄낄 꽃웃음 혼자 웃는다. 햇살엔 애기만 혼자서 아는 우스운 얘기가 들어 있는가.
애기는 기어가는 개미를 보고 또 한 번 낄낄낄 웃음을 편다. 개미네 허리에도 애기만 아는 배꼽 웃길 얘기가 들어 있는가.
애기는 어둔 밤 이불 속에서 자면서도 낄낄낄 혼자 웃는다. 잠에도 꿈에도 애기만 아는 우스운 하늘 얘긴 꽃펴 있는가.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서정주 시인 / 애를 밸 때, 낳을 때
신라 상대(上代) 여자들 가운데는 밤에 어둔 밤길을 가다가 하늘에 별빛을 입으로 읏더먹고 와서 사내하고 같이 잠자리에 들어 애기를 배는 색시도 있었네. 그것 참 무척은 황홀해 좋았을 거야!
그래서 애기가 생겨날 때는 열 달 전에 읏더먹은 그 별 내음새가 창구멍이 빵빵 나게 풍겼다는데, 노고지리 한 천 마리 하늘 날아오르듯 이것도 참 매우 매우 쌍그러웠을 거야!
―『삼국사기』 제2권, 신라본기 2, 「유례왕 원년」조 참고.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서정주 시인 / 어머니
`애기야……' 해 넘어가, 길 잃은 애기를 어머니가 부르시면 머언 밤 수풀은 허리 굽혀서 앞으로 다가오며 그 가슴 속 켜지는 불로 애기의 발부리를 지키고
어머니가 두 팔을 벌려 돌아온 애기를 껴안으시면 꽃 뒤에 꽃들 별 뒤에 별들 번개 뒤에 번개들 바다에 밀물 다가오듯 그 품으로 모조리 밀려들어오고
애기야 네가 까뮈의 이방인의 뫼르쏘오같이 어머니의 임종을 내버려두고 벼락 속에 들어앉아 꿈을 꿀 때에도 네 꿈의 마지막 한 겹 홑이불은 영원과, 그리고는 어머니뿐이다.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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