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고원 시인 / 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3.

고원 시인 / 산

 

 

멀다고들 하지만

언제나 가깝고

가까우면서도 멀리, 무척 멀리

깊고 굵은 선으로 사방을 잇는

산마음이 무겁다.

 

높은 자리 낮은 자리 가리지 않아

등성이나 마루턱을 맘놓고 굽이치고,

넘으면 그 너머 또 그 너머

하나가 백으로

겹겹이 뻗는 생각.

 

하늘과 땅을 같이 사는

     산은

말이 있기 전

시인의 머리, 시인의

가슴인가 보다.

 

정(情), 둥지, 1994

 

 


 

 

고원 시인 / 선인장

 

 

1

 

물도 없이

물이야 필요 없이

모래와 살다 보면

무너지지 않는 `무(無)'.

새끼를 친다.

 

2

 

가시의 가시가지

그 `허(虛)'에 찔리면

초록 짙은 태양이

피를 전한다.

뿔 돋친 불.

 

물너울, 창작과비평사, 1985

 

 


 

 

고원 시인 / 시간의 문법

 

 

떠나서 남은 체취와

새들이 들은 숲 속의 속삭임,

추억 때문에 과거를 안다.

 

꽃을 피울 바람의 약속이 멀어

뜬 눈으로 누운 냇가의 붕어.

기다림 때문에 현재를 느낀다.

 

잠든 태양을 머금은 바다에

등대의 실패를 흘려 보낼

성좌의 입김에 미래가 빛난다.

 

속삭이는 불의 꽃, 신흥출판사, 1964

 

 


 

고원(高遠.1925∼2008.1.20) 시인

본명 고성원(高性遠). 충북 영동 출생. 혜화전문(현 동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영국 런던대, 퀸메리대 수료. 중고등학교 교사, 통신사ㆍ신문사 기자 등에 종사하고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국원으로 일한 적도 있다. 한국시인협회 사무간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사무국장 역임.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 역임. 1954년 시지(詩誌) [시작(詩作)]을 창간, 주재, 1955년까지 6집을 발간하여 1950년대 기단의 일각을 빛냈다.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이민영, 장호와 더불어 3인 시집 <시간표 없는 정거장>에 <연착된 막차>를 발표한 이래 많은 시집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