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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서정주 시인 /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3.

 서정주 시인 /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영산홍(映山紅)

 

 

영산홍 꽃잎에는

산(山)이 어리고

 

산(山)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

 

소실댁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산(山) 너머 바다는

보름 살이 때

 

소금 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왕(王) 금와(金蛙)의 사주팔자

 

 

이것, 참, 되게는 헤성헤성한 천지에

큰 돌 두 개가

별 딴 이유도 없이

마주보고 울고 있나니,

그런 언저리에서 생겨난

노오란 똥빛의 두꺼비 모양을 한 그대여.

그대는 될랴면 왕쯤은 하나 돼야 하지 안카ㅆ나?

대왕까지는 몰라도 왕쯤은 하나 돼야 하지 안카ㅆ나?

 

그리고 또

물색 좋은 물귀신의 딸 같은,

난들난들한 버들가지 꽃 같은

그런 미인도 하나 가져야지 안카ㅆ나?

되깎이*라도 하나 갖긴 가져야지 안카ㅆ나?

 

* 되깎이란 중이 환속했다가 다시 또 중이 된다는 뜻인데, 이 뜻을 한 번 더 굴려서, 남의 아내였던 여자가 재혼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왕 금와의 아내 유화는 금와의 양조부 해모수와 통한 바 있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으니, `되깎이'인 셈이지.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소설문학사, 1982

 

 


 

 

서정주 시인 /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 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 날마다 칠해져 온 것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는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래,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에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서정주 시인 /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내가 아직 못다 부른

노래가 살고 있어요.

 

그 노래를

못 다하고

떠나 올 적에

미닫이 밖 해 어스름 세레나드 위

새로 떠 올라오는 달이 있어요.

 

그 달하고

같이 와서

바이올린을 켜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 안 나는

G선의 멜로디가 들어 있어요.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전생(前生)의 제일로 고요한 날의

사둔댁 눈웃음도 들어 있지만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이승의 비바람 휘모는 날에

꾸다 꾸다 못 다 꾼

내 꿈이 서리어 살고 있어요.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徐廷柱,1915.5.18 ~ 2000.12.24] 시인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중앙고보와 중앙 불교학원에서 수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귀촉도(歸蜀途)』(1948), 『신라초(新羅抄)』(1961), 『동천(冬天)』(1969), 『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 『산시』(1991) 등 다수의 시집과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 간행. 조선청년문학가협회·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동국대 교수 역임. 5·16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의 다수의 賞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