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 /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영산홍(映山紅)
영산홍 꽃잎에는 산(山)이 어리고
산(山)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
소실댁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산(山) 너머 바다는 보름 살이 때
소금 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왕(王) 금와(金蛙)의 사주팔자
이것, 참, 되게는 헤성헤성한 천지에 큰 돌 두 개가 별 딴 이유도 없이 마주보고 울고 있나니, 그런 언저리에서 생겨난 노오란 똥빛의 두꺼비 모양을 한 그대여. 그대는 될랴면 왕쯤은 하나 돼야 하지 안카ㅆ나? 대왕까지는 몰라도 왕쯤은 하나 돼야 하지 안카ㅆ나?
그리고 또 물색 좋은 물귀신의 딸 같은, 난들난들한 버들가지 꽃 같은 그런 미인도 하나 가져야지 안카ㅆ나? 되깎이*라도 하나 갖긴 가져야지 안카ㅆ나?
* 되깎이란 중이 환속했다가 다시 또 중이 된다는 뜻인데, 이 뜻을 한 번 더 굴려서, 남의 아내였던 여자가 재혼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왕 금와의 아내 유화는 금와의 양조부 해모수와 통한 바 있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으니, `되깎이'인 셈이지.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소설문학사, 1982
서정주 시인 /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 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 날마다 칠해져 온 것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는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래,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에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서정주 시인 /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내가 아직 못다 부른 노래가 살고 있어요.
그 노래를 못 다하고 떠나 올 적에 미닫이 밖 해 어스름 세레나드 위 새로 떠 올라오는 달이 있어요.
그 달하고 같이 와서 바이올린을 켜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 안 나는 G선의 멜로디가 들어 있어요.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전생(前生)의 제일로 고요한 날의 사둔댁 눈웃음도 들어 있지만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이승의 비바람 휘모는 날에 꾸다 꾸다 못 다 꾼 내 꿈이 서리어 살고 있어요.
동천, 민중서관,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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