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시인 / 방관자(傍觀者)의 노래
슬퍼라 가을이여! 서릿발에 서걱일 잎새는커녕, 진구렁 뿌리마저 썩더란 말가. 해마다 이맘 때면 살을 긁던 그날의 그 갈대숲, 한강(漢江)엔 인제 등뼈 굽은 피래미만 꼬리치나니.
슬퍼라 가을이여! 차라리 갈대처럼 살갗이라도 긁히고지고. 피가 배이도록 자해(自害)라도 저지르고지고. 사위(四圍)는 둘러 봐야 막막한 무인지경(無人之境). 쉬이 쉬이 손꾸락 입에 대고 하던 말 도로 멈출, 그런 눈짓이라도 만나고지고.
슬퍼라 가을이여! 이미 약물에 산천(山川)은 찌들었건만, 지금쯤 애가 탈 금수(錦繡)로운 마무리. 그러나 이런 걸 비로 울릴 한 가닥 심금(心琴)인들 없단 말이냐. 골수에 스민 방관자(傍觀者)의 뉘우침은 곪아 가나니.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 시인 / 백자부(白磁賦)
찬서리 눈보래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白鶴) 한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 끝에 풍경(風磬)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 틈에 불로초(不老草) 돋아나고 채운(彩雲) 비껴 날고 시내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드노다
불 속에 구워 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純朴)하도다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김상옥 시인 / 변신(變身)의 꽃
아무도 없는 뜨락이었다. 이내 같은 흰 꽃이 피어 있는―
가까이 가 보지 않았으나 이미 만개(滿開)한 배꽃일시 분명하다.
굳이 배꽃이 아니래도 이내같이 머흐는 꽃이었다.
하루는 이 꽃이 느닷없이 하나의 열쇠가 되었다. 꽃이 어찌 열쇠가 되는가?
느끼며 기다리며 또 오래 오래 참고 살아 볼 일이다.
이 꿈꾸듯 적적(寂寂)한 꽃은 어떤 엉구렁에서도 길을 낸다.
때로는 목숨도 잊어버리고 때로는 만남의 문턱으로 드나든다.
아무도 없는 뜨락에 호젓이 핀 이 이내 같은 꽃은―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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