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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남주 시인 / 학살 1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9.

김남주 시인 / 학살 1

 

 

오월 어느 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은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 놓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 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 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고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 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다

밤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는 처참하지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렇게는 치밀하지 못했으리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김남주 시인 /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손을 맞잡고 가자

열이면 열 천이면 천 생사를 같이하자

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자

고개 너머 마을에서 목마르면 쉬었다 가자

서산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김남주(金南柱 1946∼1994) 시인

전라남도 해남 출생. 광주일고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수학하였다. 19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 1977년 황석영(黃晳暎)·정광훈·홍영표·윤기현 등과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15년 형 선고를 받고 9년째 복역 중 1988년 12월 가석방으로 출옥하였다. 1991년 신동엽(申東曄) 창작기금을 수상. 주요 저서로는 시집으로 ≪진론가 鎭魂歌≫·≪나의 칼 나의 피≫·≪조국은 하나다≫, 시선집 ≪사랑의 무기≫·≪솔직히 말하자≫·≪마침내 오고야 말 우리들의 세상≫·≪학살≫·≪사상의 거처≫·≪이 좋은 세상에≫가 있으며, 산문집 ≪시와 혁명≫, 번역서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프란츠 파농)·≪아트 트롤≫(H.하이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