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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시인 / 하급반 교과서
아이들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 아이가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면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 읽기여 우리 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월식, 민음사, 1980
김명수 시인 / 헬리콥터
중량교 밖에 집이 있는 나는 의정부 쪽 하늘로 날아 가는 헬리콥터를 아들과 함께 바라보고 있다
옛날 가교사 옆 폭탄에 패인 웅덩이에서 잠자리를 잡으며 바라보던 저 헬리콥터를
전쟁이 지나간 지 삼십년이 지난 날에 이제는 우리 눈에 익숙해 버렸지만 오늘은 일요일 세상이 온통 의문투성이인 내 네 살 난 어린 아들과 이마에 손 얹고 바라보면서 나는 어떻게 내 지나간 어린 시절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일곱 살 때였던가 삐라를 뿌리며 읍내 상공을 커다란 프로펠러 빙글빙글 돌리며 버짐난 우리들 머리 위로 날아 가던 저 비행기 잠자리채 속에 사로잡았던 장수잠자리보다 더 신기하던 헬리콥터를
우리들 조무라기 환호성을 울리며 떼지어 넘어지며 뒤쫓아 따라갈 때 하상(河床)드러낸 낙동강 너머로 유유히 유유히 사라지더니
오늘은 다시 우리집 마당에 그림자 드리우며 날아 가는 헬리콥터여
아직도 평화가 멀기만 하고 아직도 아픔이 아물지 않는 월남땅에 내 자라서 자유의 용사로 파병되었을 적 끝 모르는 정글에 매복하던 밤 후진국 늪지 위에 슬픔으로 떠오르던 헬리콥터여
오늘은 맑은 가을 하늘 날 서울에서도 하늘은 푸르기만 한데 아들아 내 네 살 난 어린 아들아
어느 곳에서나 쉽사리 앉기도 하고 어느 곳에서나 쉽사리 뜨기도 잘 한다는 저 커다란 강대국 헬리콥터를 나는 너에게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을까
하급반 교과서, 창작사, 1983
김명수 시인 / 호랑나비
경상도집 아주머니가 낮잠을 잔다 서른 살에 혼자 되어 산전수전 다 겪었다
억세고 요란스런 경상도 아주머니 오늘은 공일이라 색시들 다 소풍 보냈다 하나뿐인 뚱뚱이 딸도 따라 보냈다
보아라, 경상도집 아주머니 태평스런 낮잠 속에 이 세상 쓸쓸하고 아름다운 만고풍상
꿈 속에 꿈 속에 봄날 천지에 호랑나비 한 마리만 날아 다닌다
월식, 민음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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