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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 시인 / 우금치의 노래
그날이었는지 몰라라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무엇이 생긴 것은 그날이었는지 몰라라 우리가 우리의 죽은 몸 위에 가시덤불로 피어 넘을 수 없는 무엇을 넘기 시작한 것은
옛적에는 굶주린 사내들이 들어와 소도둑이 되었다는 좁은 고갯길 흰 옷 입은 동학군들이 죽어 산을 이루던 이곳이었는지 몰라라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넘을 수 없는 철조망을 치던 것은 이곳이었는지 몰라라 우리가 우리의 죽은 몸 위에 뿌리를 내려 넘을 수 없는 철조망을 넘기 시작한 것은
아, 그때부터였는지 몰라라 우리가 노예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아, 그때부터였는지 몰라라 우리가 우리 속에 빛나는 하늘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우금치여, 휴전선이여, 모든 철조망이여 우리들의 절망은 우리들의 희망 노예의 노래는 빛나는 하늘 진달래 뿌옇게 핀 좁은 고갯길 지금도 소리쳐 오는 함성은 우리의 것.
아직도 피가 뜨거운 사내들은 죽음처럼 새파랗게 날선 고개를 넘는다. 우리들의 새벽 출근길에, 책 위에, 식탁 위에 문득 문득 막아서는 우금치여, 휴전선이여, 모든 철조망이여 너를 넘는다. 우리들의 죽은 몸 위에 뿌리를 내려 넘을 수 없는 너를 넘는다.
광화문을 지나며, 풀빛, 1986
김진경 시인 / 이 땅에 산다는 것은
이 땅에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갈라진 사람을 만나게 한다는 것이다. 갈라진 나를, 갈라진 우리를, 갈라진 하늘을, 갈라진 땅을 네가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이 땅이 그렇게 숨쉬고 있으므로 이 하늘이 그렇게 숨쉬고 있으므로 우리들이 그렇게 숨쉬고 있으므로 이 작은 하늘의 한 자락을 나누어 숨쉬고 있는 너는 이 작은 땅의 한 자락을 나누어 숨쉬고 있는 너는 보게 될 것이다. 네 삶을 바꾸어 놓고 말없이 사라져 가는 한 사람. 그렇다, 아이야 80년의 어느 봄날 내가 그를 보았듯이 거리를 걷는 사람들 속에서 벌거숭이로 피는 목련꽃 속에서 아, 두려워 숨죽여 부정하고 부정하고 부정한 한 사람을 너는 보게 될 것이다. 너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하고, 우리들 모두이기도 하고 그 누구도 아닌 한 사람, 이 땅에 산다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한 사람을 우리 모두로 사는 것이다. 네가 그리는 모든 선으로 그를 그리는 것이다. 노동하며 땀흘리는 분노하며 피흘리는 한 사람의 죽음이 모두의 죽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도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두를 죽이고도 한 사람도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일매일 뽑고 낫질하는 땅에도 작은 풀꽃이 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시대의 예수, 실천문학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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