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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4
상어는 이 도시의 어느 건물 안에서도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정작 나는 갑판 위에서 작살을 날리지 못하였다. 날마다 작살의 날을 시퍼렇게 갈고 또 갈았지만 나는 작살을 쓸 수 없었다. 무엇인가 그물에 걸려서 퍼덕일 것 같은 번쩍임의 예감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날마다 을지로나 청계천으로 노를 저어가지만 헛일이었다. 아아, 헛일이었다. 눈은 와서 이미 겨울 바다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석유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물 사이로 빠지는 눈 오는 바다를 금전출납부 위에 올려놓고 아침마다 도장으로 눌러대지만, 계산기 위에 결제서류의 숫자를 두드리고 또 두드리지만, 한 장의 방한복으로 추위를 가린 젊은 수부의 항로는 어디로 열려 있나. 상어가 출몰하는 흉흉한 바다, 그물을 물어뜯고 배를 뒤엎어놓는 저놈의 상어, 음흉한 상어는 이 도시의 어느 건물 안에서도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아아, 나는 왜 작살을 날려 저놈의 심장을 꿰뚫지 못하나. 춥고 어두운 겨울 항로 가운데 오늘은 한 젊은 수부가 사는 화곡동에 닻을 잠시 내리고 잔을 나누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6
암초를 보았다 청계천이나 을지로, 삼일로나 종로 혹은 퇴계로의 어느 쪽이거나 노를 저어가는 곳마다 그것은 불쑥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뿌리를 내리지 않은 어뢰마냥 둥둥 떠서 그것은 나의 배 곁에 따로 다가와 있었다. 항해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저 절대적인 힘의 덫을 우회하기 위하여 나는 한낮에도 날개를 접고 돛을 접고 점화하는 일마저 삼가야 한다 저 암초에 부딪혀 부질없이 사라져간 어리석은 수부들을 생각하라 우리가 날마다 떠 흐르는 바다 위에서 상하고 으깨어진 일이 어디 이것뿐이랴 진달래.개나리가 그리운 오늘은 선창을 활짝 열고 4월에 침몰했던 젊은 수부들의 혼을 떠올리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7
을지로 쪽을 날마다 항해하다가 느낀 일이지만 나는 바람 한 점 없는 이 고요한 바다에서 해적들을 불러 모으리라 작심하였다. 을지로 2가에서 닻을 내리고 한밤중에 자주 나는 이 부근에 가라앉았던 해적선을 인양하려 했지만, 마하트마 간디가 갖고 있을 법한 해저 케이블에 걸려 쓰러지기를 여러 번 하였다. 퇴계로 목에서 흐르는 물살을 타고 1960년 4월에 가라앉았던 수부(水夫)들이 갑판 위로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오는 시각에 황량한 바다를 항해하고자 하는 해적들과 함께 나는 안개 자욱한 이 항구에서 무적(霧笛)을 울리고 싶었던 것이다. 목발을 짚은 이 시대의 절름발이들, 애꾸눈이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을 싣고, 의(義)와 사랑을 선창 가득히 싣고, 개인적인 우수(憂愁)를 존중할 줄 아는 해적선의 수부들과 함께 날카롭게 이 시대의 물살을 가르고 싶었던 것이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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