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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시인 / 별
얼마나 울어야 우리는 하늘의 별처럼 저러이 빛날 수 있을까
얼마나 몸부림쳐야 우리는 밤하늘에 저러이 투명함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칼과 흙, 문학과지성사, 1989
김준태 시인 / 보리밥
나는 뜨끈뜨끈하고도 달작지근한 보리밥이다 남도(南道) 끝의 툇마루에 놓인 보리밥이다 금이 가고 이빠진 황토빛 툭사발을 끼니마다 가득 채운 넉넉한 보리밥이다 파리떼 날아와 빨기도 하지만 흙 묻은 입속으로 들어가는 보리밥이다 누가 부러워하고 먹으려 하지 않은 노랗디 노오란 꺼끌꺼끌한 보리밥이다 누룽지만도 못하다고 상하(上下)로 천대를 받는 푸른 하늘 밑의 서러운 보리밥이 아닌가 개새끼야 에그 후라이를 먹는 개새끼야 물결치는 청보리밭 너머 폐허(廢墟)를 가려면 나를 먹어 다오 혁대를 풀어제쳐 땀나게 맛있게 많이 씹어 다오 노을녘 한참때나 눈치채어 삼키려는 저 엉큼한 놈들의 무변(無邊)의 혓바닥을 눌러 앉아 하늘 보고 땅을 보며 억세게 울고 싶은데 아이구머니나, 어느 흉년이 찾아들어 누가 참 오랜만에 나를 먹으려 한다 보리밥인 나를 어둑어둑한 뒷구멍으로 재빨리 깊숙이 사정없이 처넣더니 그칠 줄 모르는 방귀만 잘 새어 나온다고 돌아서서 다시 퉤퉤 뱉어버린다.
참깨를 털면서, 창작과비평사, 1977
김준태 시인 / 부끄러움
먼 도시에서 물 한 모금 마시는 데도 돈을 내고 오줌 한 번 싸는 데도 돈을 내다가
고향에 내려와서 공짜로 가을하늘을 본다 공짜로 밤하늘의 별을 본다 죽어서 별이 된 사람들을 아, 공짜로만 보고 있다니!
칼과 흙, 문학과지성사, 1989
김준태 시인 / 북한여자(北韓女子)
밤마다 나는 북한 여자와 잠을 자지만 아들 한번 고구려 사내놈처럼 낳으려고 그녀와 대한민국 전체로 보름달로 놀아나지만 딸 한번 평안도 기생같이 쏘옥 빼내려고 그녀의 숨겨진 땅을 진흙덩이로 뒹굴지만 늪수렁에 감춰진 열쇠를 맨주먹으로 비틀지만 첫새벽에 먼저 일어나 잠든 그녀를 보면 육이오 때 밀리어 왔다가 지금은 고작 밥벌이로 술집을 차린 피난민 여자가 아닌가 팽팽했던 몸은 어느덧 전국(全國)으로 늙어 빠져버려 저무는 공사판이나 쫓아다니며 기웃기웃거리는 비 맞은 암탉이 아닌가 쑥구렁의 도둑고양이가 아닌가 나 같은 막벌이나 끙끙 보듬고 식은땀을 흘리는 뻣세디뻣센 늦가을의 쑥이파리가 아닌가 내가 밤마다 만나는 북한여자(北韓女子)는 내 살덩이를 삼팔선인 양 물어뜯으며 흐느낀다 육체여, 그날 내려온 북한여자라도 곁에 있으니까 나 같은 막벌이꾼도 간혹 허전함을 달랜다 내 가슴 구석에도 텅 비어 있는 황량한 북한땅을 남으로 내려온 그녀의 늙은 몸으로나마 채운다 그녀의 쭈그러진 살에서나마 북한땅을 더듬는다.
참깨를 털면서, 창작과비평사, 1977
김준태 시인 / 불이냐 꽃이냐
어떤 사람은 불의 길을 가지만 어떤 사람은 꽃의 길을 간다 어떤 사람은 불을 역사라 말하지만 어떤 사람은 꽃을 역사라 말하고 어떤 사람은 아우성의 길을 가지만 어떤 사람은 노래의 길을 간다
너희여 참삶이란 불이냐 꽃이냐 사랑의 참길이란 불이냐 꽃이냐 불은 밤의 어두움을 밝히지만 꽃은 낮의 어두움을 밝힌다 불이 피묻은 칼을 녹여버릴 때 꽃은 피묻은 칼을 닦아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불의 길을 가지만 어떤 사람은 꽃의 길을 간다 어떤 사람은 아우성의 길을 가지만 어떤 사람은 노래의 길을 간다 어떤 사람은 아우성과 노래의 길을 한꺼번에 간다 어떤 사람은 불과 꽃의 길을 한꺼번에 한꺼번에 간다.
불이냐 꽃이냐, 청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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