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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금찬 시인 / 산새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8.

황금찬 시인 / 산새

 

 

창을 열어놓았더니

산새 두 마리 날아와

반 나절을 마루에 앉아

이상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날아갔다.

 

어느 산에서 날아왔을까.

구름 빛 색깔

백운대에서 날아온

새였으리라.

 

새가 남기고 간 목소리는

성자의 말처럼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

곧 귀에 남아 있다.

 

새가 앉았던 실내에선

산냄새, 봄풀, 구름향기

맑은 물소리까지 들리고 있다.

 

산새같이 마음 맑은 사람은

이 세상에 정녕 없을까.

그가 남긴 음성은

성자의 말이 되어

이 땅에 길이 남을…….

 

오늘도 나는

창을 열어 놓고 있다.

산새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산새, 종로서적, 1975

 

 


 

 

황금찬 시인 / 삼십오년

 

 

한 삼십오년쯤 만에

어릴 때의 친구를 만나면

그들도 나처럼 많이 변했다.

 

어떤 친구는 배가 불쑥 나와서

이야기할 때 땅만 보고 말하고

또 어떤 친구는 머리를 보고 말하고

또 어떤 친구는 머리를 뒤로 제치며

너털웃음을 웃는 재주를 배웠다.

 

그리고 어떤 친구는

코밑에 수염을 카이제르처럼 틀어올리고 말끝마다

`인생이라는 것은'을 찾는 인생론파가 되고

세상이 써서 할 말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어릴 때 약하던 놈은 커서도 그렇고

어려서부터 남의 등을 잘 치던 놈은

크니까 부자나 권력자가 되었다.

 

삼십오년 만에 만나는 친구가 목발로 걸어온다.

6․25 때 다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에게 할 말이 없다.

손을 잡고 흔들다가 놓으며

"생명이 살아 있어 다행일세."

 

그들은 이렇게들 변했다.

나도 무척 변한 것이다.

못 마시던 술을 마시고 주정을 배웠으니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그때나 이때나 약한 놈은 못산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구나.

 

월의 나무, 한림출판사, 1969

 

 


 

 

황금찬 시인 / 새벽에

 

 

오늘밤

닭이 벌써 세 번을 울었는데

내게는 아직도 뉘우침이 없는 것이 슬프다.

 

이제는 잠을 깨어야 할 때다.

그리고 새벽의 종소리를

들어야 한다.

 

종소리는

호수에 물살이 돌아가듯

종소리는

 

차라리

새벽의 울리는 은은한

축도

 

천 년을 살기보다

그냥 앉아

가시던 그 길을 지키고 싶다.

 

구름꽃

꽃무늬

저녁 하늘가

 

만 길 돌 층계를 밟고 내리는

나는 여기 공손히

석탑을 세워야 하겠다.

 

기도의 마음 자리, 성서교리간행회, 1981

 

 


 

 

황금찬 시인 / 설화(雪花)

 

 

밤에 눈이 내려

아침엔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운다.

 

산에선 솔씨 한 알

주울 수 없어

꿩의 수심이

숲보다 깊다.

 

변모하는 산

동화 속 공주의

발자국도 없어

마음이 시리다.

 

백운대, 인수봉이

눈에 덮였다.

멀어져 가는

석화의 꿈

 

어느날

인수봉에 부서진

꽃잎들의 체온이

식어가고 있다.

 

별이 있는 밤, 양림사, 1983

 

 


 

황금찬 시인(黃錦燦 1918년-2017년)

1918년 강원 속초시 출생. 1947년 ,새사람>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하였고 1951년 시 동인 '청포도'를 결성했다. 1953년 <문예>지에 <경주를 지나며>가 추천되어 정식으로 등단했다. 1965년 첫 시집 <현장>을 낸 이후 2008년 <고향의 소나무>까지 거의 매년 시집을 낼 정도로 왕성한 창작을 해왔다. 1948~78년에 강릉농업고등학교, 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했고, 1978~80년 중앙신학대학 기독교문학과 교수, 1980년~94년에는 추계예술대학, 숭의여자전문대학, 한국신학대학에서 강의했다. 1996 대한민국문학부문문화예술상. 1992 문화의 달 보관문화훈장. 1990 서울시 문화상. 1982 한국기독교 문학상. 1973 월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