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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찬 시인 / 산새
창을 열어놓았더니 산새 두 마리 날아와 반 나절을 마루에 앉아 이상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날아갔다.
어느 산에서 날아왔을까. 구름 빛 색깔 백운대에서 날아온 새였으리라.
새가 남기고 간 목소리는 성자의 말처럼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 곧 귀에 남아 있다.
새가 앉았던 실내에선 산냄새, 봄풀, 구름향기 맑은 물소리까지 들리고 있다.
산새같이 마음 맑은 사람은 이 세상에 정녕 없을까. 그가 남긴 음성은 성자의 말이 되어 이 땅에 길이 남을…….
오늘도 나는 창을 열어 놓고 있다. 산새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산새, 종로서적, 1975
황금찬 시인 / 삼십오년
한 삼십오년쯤 만에 어릴 때의 친구를 만나면 그들도 나처럼 많이 변했다.
어떤 친구는 배가 불쑥 나와서 이야기할 때 땅만 보고 말하고 또 어떤 친구는 머리를 보고 말하고 또 어떤 친구는 머리를 뒤로 제치며 너털웃음을 웃는 재주를 배웠다.
그리고 어떤 친구는 코밑에 수염을 카이제르처럼 틀어올리고 말끝마다 `인생이라는 것은'을 찾는 인생론파가 되고 세상이 써서 할 말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어릴 때 약하던 놈은 커서도 그렇고 어려서부터 남의 등을 잘 치던 놈은 크니까 부자나 권력자가 되었다.
삼십오년 만에 만나는 친구가 목발로 걸어온다. 6․25 때 다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에게 할 말이 없다. 손을 잡고 흔들다가 놓으며 "생명이 살아 있어 다행일세."
그들은 이렇게들 변했다. 나도 무척 변한 것이다. 못 마시던 술을 마시고 주정을 배웠으니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그때나 이때나 약한 놈은 못산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구나.
월의 나무, 한림출판사, 1969
황금찬 시인 / 새벽에
오늘밤 닭이 벌써 세 번을 울었는데 내게는 아직도 뉘우침이 없는 것이 슬프다.
이제는 잠을 깨어야 할 때다. 그리고 새벽의 종소리를 들어야 한다.
종소리는 호수에 물살이 돌아가듯 종소리는
차라리 새벽의 울리는 은은한 축도
천 년을 살기보다 그냥 앉아 가시던 그 길을 지키고 싶다.
구름꽃 꽃무늬 저녁 하늘가
만 길 돌 층계를 밟고 내리는 나는 여기 공손히 석탑을 세워야 하겠다.
기도의 마음 자리, 성서교리간행회, 1981
황금찬 시인 / 설화(雪花)
밤에 눈이 내려 아침엔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운다.
산에선 솔씨 한 알 주울 수 없어 꿩의 수심이 숲보다 깊다.
변모하는 산 동화 속 공주의 발자국도 없어 마음이 시리다.
백운대, 인수봉이 눈에 덮였다. 멀어져 가는 석화의 꿈
어느날 인수봉에 부서진 꽃잎들의 체온이 식어가고 있다.
별이 있는 밤, 양림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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