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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수 시인 / 결여(缺如)
나는 겨우 몇 발짝 뗄 수 있는 내 앞밖에는 보지 못한다. 그 앞도 시력이 끝나는 지평 밖은 암흑이다. 뒤를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뒤로 돌려야 하는데, 그때는 조금 전의 그 앞이 새로운 뒤로 바뀐다. 사람은 그 뒤를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 뒤는 암흑 세계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혹은 왼쪽으로도 돌릴 수 있으나, 그래도 좌우는 언제나 남아서 암흑 세계다. 이런 암흑 속에서도 나는 무사하다.
나는 삼수 끝에 겨우 운전 면허증을 땄다. 운전대에 앉기만 하면 손이 떨린다. 앞차의 꽁무니만 보고 열심히 따라간다. 후면과 좌우는 암흑이다. 좌우로는 살벌한 차량들이 엇갈리고, 뒤로는 덤프, 택시, 버스들이 덮칠 듯이 바싹 붙어서 밀려온다. 그래도 나는 용하게 살아남아서 달린다. 누가 이 암흑, 이 결여(缺如)를 보충해주고 있는 것일까.
조금씩 줄이면서, 시문학사, 1985
문덕수 시인 / 계단
계단으로 굴러내려가는 돌들이 한동안 찢어지는 아픈 소리로 울부짖다가 깊은 물 속에 빠진 듯 잠잠해진다. 계단으로 굴러내려가는 돌들이 나뭇가지처럼 길쭉하게 뻗다가는 달빛에 살기 띤 날을 세우고 가끔은 모난 루비로 빛난다. 돌들이 굴러내려가는 맨 끝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는 사나이가 있다. 스치고 부딪칠 때마다 발을 찍히고 돌무더기를 꽃잎처럼 안고 쓰러졌다가는 일어서고 일어서곤 하는 사나이도 인제는 돌이 되어 올라간다.
새벽바다, 성문각, 1975
문덕수 시인 / 공간
앞차가 서면 나도 서야 한다. 내 뒷차도 따라 설 것이다. 그리고 그 뒷차도 그 뒷차의 뒷차도―차례로 서는 동작이 한동안 아니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앞차와 내 차 사이에 범할 수 없는 공간이 생긴다. 내 뒷차와의 사이에도, 그리고 그 뒷차와 뒷차 사이에도―그리하여 빈 상자(箱子)와 같은 공간이 열을 지을 것이다. 그것은 안전을 지켜주는, 구슬을 꿴 줄같이 아름답다.
앞차가 떠나면 나도 뒤따라 떠난다. 내 뒷차도 나를 따를 것이다. 그리고 그 뒷차도, 그 뒷차의 뒷차도―그리하여 좁혔다 넓혔다 하는 공간이 일렬로 늘어서서 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들 중에서 어느 한 공간이 죽을 때, 오, 그 순간의 충돌, 비명, 유혈……, 그러나 다만 한동안의 파문(波紋)일 뿐, 그 공간들은 여전히 일렬로 늘어서서 달릴 것이다. 영원히.
조금씩 줄이면서, 시문학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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