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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구상 시인 / 강(江)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2.

구상 시인 / 강(江)

 

 

9

 

붉은 산굽이를 감돌아 흘러오는

강물을 바라보며

어느 소슬한 산정(山頂) 옹달샘 속에

한 방울의 이슬이 지각(地殼)을 뚫은

그 순간을 생각는다네.

 

푸른 들판을 휘돌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마침내 다다른 망망대해(茫茫大海)

넘실 파도에 흘러들어

억겁(億劫)의 시간을 뒤치고 있을

그 모습을 생각는다네.

 

내 앞을 유연(悠然)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증화(蒸化)를 거듭한 윤회(輪廻)의 강이

인업(因業)의 허물을 벗은 나와

현존(現存)으로 이곳에 다시 만날

그날을 생각는다네.

 

10

 

저 산골짜기 이 산골짜기에다

육신(肉身)의 허물을 벗어

흙 한줌으로 남겨놓고

사자(死者)들이 여기 흐른다.

 

그래서 강은 뭇 인간의

갈원(渴願)과 오열(嗚咽)을 안으로 안고

흐른다.

 

나도 머지않아 여기를 흘러가며

지금 내 옆에 앉아

낚시를 드리고 있는 이 막내애의

그 아들이나 아니면 그 손주놈의

무심한 눈빛과 마주치겠지?

 

그리고 어느 날 이 자리에서

또다시 내가 찬미(讚美)만의 모습으로

앉아 있겠지.

 

16

 

강은

과거에 이어져 있으면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강은

오늘을 살면서

미래를 산다.

 

강은

헤아릴 수 없는 집합(集合)이면서

단일(單一)과 평등(平等)을 유지한다.

 

강은

스스로를 거울같이 비춰서

모든 것의 제 모습을 비춘다.

 

강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한다.

 

강은

그 어떤 폭력이나 굴욕에도

무저항(無抵抗)으로 임하지만

결코 자기를 잃지 않는다.

 

강은

뭇 생명에게 무조건 베풀고

아예 갚음을 바라지 않는다.

 

강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려서

어떤 구속(拘束)에도 자유롭다.

 

강은

생성(生成)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무상(無常) 속의 영원을 보여준다.

 

강은

날마다 판토마임으로

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다.

 

구상연작시집, 시문학사, 1985

 

 


 

 

구상 시인 / 구상무상(具常無常)

 

 

이제 세월처럼 흘러가는

남의 세상 속에서

가쁘던 숨결은 식어가고

뉘우침마저 희미해가는 가슴.

 

나보다도 진해진 그림자를

밟고 서면

꿈결 속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그저 심심해 서 있으면

해어진 호주머니 구멍으로부터

바람과 추억이 새어나가고

꽁초도 사랑도 흘러나가고

무엇도 무엇도 떨어져버리면

 

나를 취하게 할 아편도 술도 없어

홀로 깨어 있노라.

아무렇지도 않노라.

 

구상시집, 청구출판사, 1951

 

 


 

 

구상 시인 / 그분이 홀로서 가듯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2천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無力)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敗北)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정의(正義)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아무런 영웅적(英雄的) 기색(氣色)도 없이

아니,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復活)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 르낭의 말

** 구약(舊約)의 말

 

말씀실상(實相), 1980

 

 


 

구상(具常 1919년-2004년) 시인. 언론인

본명 구상준(具常浚). 호(號)는 운성(暈城). 1919년 9월 16일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경성부 출생. 1941년 일본대학 종교과를 졸업했다.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동인시집 〈응향 凝香〉에 〈길〉·〈여명도 黎明圖〉·〈밤〉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작품들이 강홍운·서창훈 등의 시와 함께 회의적·공상적·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반동작가'로 몰리자 이듬해 월남했다. 〈백민〉에〈발길에 채인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1947)·〈유언〉(1948)·〈사랑을 지키리〉(1949) 등을 발표했으며, 〈영남일보〉·〈경향신문〉 등의 논설위원을 지냈다. 1951년 첫 시집 〈구상시집〉을 펴냈고, 1956년 6·25전쟁을 제재로 한 시집 〈초토의 시〉를 펴내 1957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