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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혜순 시인 / 도솔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2.

김혜순 시인 / 도솔가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신발 좀 빌어 달라 그러며는요

신발을 벗었더랬죠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부축해 다오 발이 없어서 그러며는요

두 발을 벗었더랬죠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빌어 달라 빌어 달라 그러며는요

가슴까지 벗었더랬죠

 

하늘엔 산이 뜨고 길이 뜨고요

아무도 없는 곳에

둥그런 달이 두 개 뜨고 있었죠

 

또 다른 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1

 

 


 

 

김혜순 시인 / 딸을 낳던 날의 기억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거울 안에 어머니가 앉아 계시고

거울을 열고 다시 들어가니

그 거울 안에 외할머니 앉으셨고

외할머니 앉은 거울을 밀고 문턱을 넘으니

거울 안에 외증조할머니 웃고 계시고

외증조할머니 웃으시던 입술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니

그 거울 안에 나보다 젊으신 외고조할머니

돌아 앉으셨고

그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또 들어가니

또 다시 들어가니

점점점 어두워지는 거울 속에

모든 웃대조 어머니들 앉으셨는데

그 모든 어머니들이 나를 향해

엄마 엄마 부르며 혹은 중얼거리며

입을 오물거려 젖을 달라고 외치며 달겨드는데

젖은 안 나오고 누군가 자꾸 창자에

바람을 넣고

내 배는 풍선보다

더 커져서 바다 위로

이리 둥실 저리 둥실 불리워 다니고

거울 속은 넓고넓어

지푸라기 하나 안 잡히고

번개가 가끔 내 몸 속을 지나가고

바닷속에 자맥질해 들어갈 때마다

바다 밑 땅 위에선 모든 어머니들의

신발이 한가로이 녹고 있는데

청천벽력.

정전. 암흑천지.

순간 모든 거울들 내 앞으로 한꺼번에 쏟아지며

깨어지며 한 어머니를 토해내니

흰옷 입은 사람 여럿이 장갑 낀 손으로

거울 조각들을 치우며 피 묻고 눈 감은

모든 내 어머니들의 어머니

조그만 어머니를 들어올리며

말하길 손가락이 열 개 달린 공주요!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김혜순 시인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강원대학교 국문학과와 건국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 국어국문학 박사.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체' 로 등단. 1997년 제16회 「김수영문학상」, 2000년 제1회 「현대시작품상」, 2000년 제15회 「소월시문학상」, 2006년 제6회 「미당문학상」, 2008년 제16회 「대산문학상」 수상. 시집  『또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여행기』, 『들끓는 사랑』 등이 있음. 2002 문학계간지 파라21 편집위원. 2000 시전문계간지 포에지 편집위원. 현재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