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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인 / 도솔가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신발 좀 빌어 달라 그러며는요 신발을 벗었더랬죠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부축해 다오 발이 없어서 그러며는요 두 발을 벗었더랬죠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빌어 달라 빌어 달라 그러며는요 가슴까지 벗었더랬죠
하늘엔 산이 뜨고 길이 뜨고요 아무도 없는 곳에 둥그런 달이 두 개 뜨고 있었죠
또 다른 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1
김혜순 시인 / 딸을 낳던 날의 기억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거울 안에 어머니가 앉아 계시고 거울을 열고 다시 들어가니 그 거울 안에 외할머니 앉으셨고 외할머니 앉은 거울을 밀고 문턱을 넘으니 거울 안에 외증조할머니 웃고 계시고 외증조할머니 웃으시던 입술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니 그 거울 안에 나보다 젊으신 외고조할머니 돌아 앉으셨고 그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또 들어가니 또 다시 들어가니 점점점 어두워지는 거울 속에 모든 웃대조 어머니들 앉으셨는데 그 모든 어머니들이 나를 향해 엄마 엄마 부르며 혹은 중얼거리며 입을 오물거려 젖을 달라고 외치며 달겨드는데 젖은 안 나오고 누군가 자꾸 창자에 바람을 넣고 내 배는 풍선보다 더 커져서 바다 위로 이리 둥실 저리 둥실 불리워 다니고 거울 속은 넓고넓어 지푸라기 하나 안 잡히고 번개가 가끔 내 몸 속을 지나가고 바닷속에 자맥질해 들어갈 때마다 바다 밑 땅 위에선 모든 어머니들의 신발이 한가로이 녹고 있는데 청천벽력. 정전. 암흑천지. 순간 모든 거울들 내 앞으로 한꺼번에 쏟아지며 깨어지며 한 어머니를 토해내니 흰옷 입은 사람 여럿이 장갑 낀 손으로 거울 조각들을 치우며 피 묻고 눈 감은 모든 내 어머니들의 어머니 조그만 어머니를 들어올리며 말하길 손가락이 열 개 달린 공주요!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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