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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17
파리 정박 이틀, 나는 가보았다 셍 미셀 여자형무소의 단두대 돌벽으로 된 지하 암벽에 암혈의 어둠을 껴안고 죽어갔던 여인들을 만났다 죽을 때까지 돌벽에 새긴 저희의 이름 헬렌, 엘레나, 마들렌… 단 하룻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녀들은 차라리 지상의 자유와 공기를 버렸다 활달하고 부드러운 눈짓으로 그녀들은 달려나와 금빛 정조대의 열쇠를 흔들었고 나는 7백 년 저쪽의 시간의 벽 속으로 노질하기 시작했다 새벽 두시의 보랏빛 파리 술잔을 기울이며 정조대가 벗겨진 파리의 탄력을 힘껏 껴안았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20
오늘은잔잔,황사바람마저불지않았다. 어느바다에도물이보이지않았으므로나는노를젓지않았다. 항해등도꺼버리고드디어나는빈손으로표류하기시작하였다. 흘러간시간속에서부표가하나씩떠오르기시작했다.
―대낮에씨를받기위해이웃의유부녀와아버지가화간(和姦)하고있을때말이지요. 그때종마가되어달리던아버지가말이지요. 어떤체위로신음소리를내고있는지말이지요. 궁금하게여기고있을어머니가말이지요. 그때어머니는두남녀의대낮정사를돕기위해그간음을지켜주기위해말이지요. 문바깥에서문고리를잡고보초를서고있었지요. 그때도어머니의남빛바다에는물이보이지않았는데요. 항해등도꺼졌는데요.
그때다른여인의몸에서태어난여아(女兒)를나는항해중에여러번만났다. 순애야순애야, 그녀의얼굴은내가가진거울속에기끔비쳐보였는데성별만다른나의얼굴이었다. 아버지의생애를담은배가당감동의화장터에서소각되고난다음에도나의배는표류하였다. 아버지가물길을거슬러오르며꽃씨를심던그날불가사의한부표가오늘종로의물목에서불쑥떠올랐다. 순애야, 그러나나는너를알지못한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21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아버지를 보면 나는 도끼로 패주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민중시를 쓰지 못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한낱 장사아치의 계산기가 더 소중스럽지만 민중민중민중민중민중민중 말의 남발보다 땀 흘려 일하는 개인주의를 더 사랑한다. 절망과 눈물과 구호를 단지 속에 묻어놓고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아버지를 보면 나는 도끼로 패주고 싶은 것이 있다. 사십 년 전, 아버지가 쥔 도끼자루는 녹슬었지만 밑바닥을 살았던 아버지의 적개심이 이 가을에 문득 내 손에도 쥐어져 있구나.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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