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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진경 시인 / 편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2.

김진경 시인 / 편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지를 부칩니다.

이제까지 쓰기는 많이 썼지만

봉투에 넣어 부치지는 못했습니다.

어린시절 저녁을 못 먹고 잠드는 밤

어머니는 몇 천 장 종이뭉치를 이고 오셨습니다.

한 장 한 장 일일이 풀칠을 하고

접어 붙이고 우리들이 지쳐서 잠든 뒤에도

어머니는 밤새워 편지봉투를 붙이셨습니다.

새벽에 만든 봉투를 이고 나가시고

한됫박 쌀을 사다 밥을 지었습니다.

밤을 새운 긴 노동 뒤에

상에 오른 한 그릇 밥을 보셨습니까.

밥알 위에 떨어지는 눈물을 보셨읍니까.

세상은 못 견디게 엄숙한 것이었습니다.

나날의 생활이 이렇게 사랑의 노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세상은 너무도 엄숙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배움이 부끄러웠습니다.

손가락이 다 해지도록 풀칠을 하는 어머니 곁에서

읽어 가는 교과서의 페이지들이 부끄러웠습니다.

아, 어머니는 늘 나의 한계였습니다.

나의 말이 사랑이 되고 노동이 되어

한 장의 봉투에 배인 어머니의 눈물을 넘어설 수 없다면

나는 영원히 아무에게도 나의 말을 건네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읍니다. 어머니는 늘 나의 결벽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노동을 넘어서지 못하는

나의 말들은 늘 나에겐 채찍이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지를 부칩니다.

편지를 부칠까 말까 망설이며

몇 걸음 걷다가 깨달음처럼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너의 말을 너의 것으로 가두는 한

영원히 사랑과 노동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내리는 눈발은 서로 엉기며 떨어져 한세상을 덮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지를 부칩니다.

이것은 사랑과 노동이 더이상 버림받지 않는

새 날을 향한 나의 노래입니다.

내가 나에게 내민 최초의 악수입니다.

아내여, 창밖엔 눈이 내리고

이 밤은 당신이 처음으로

서러운 이땅의 어머니가 되는 밤입니다.

 

광화문을 지나며, 풀빛, 1986

 

 


 

 

김진경 시인 / 풍뎅이

 

 

풍뎅이 한 마리가 유리창에 늘어붙어 날고 있다.

보이지 않는 유리벽,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안타까이 다리를 버둥거린다. 그렇다.

우리들의 만남은 늘 벽이었다.

아이들의 이름을 모르는 선생과

선생의 이름을 모르는 아이들이 만나는 교실.

 

유리창에 늘어붙어 허우적거리는 풍뎅이처럼

우리들의 말은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안타깝게 더듬거리고

늘 그랬다. 추락해서 날개가 부러진 풍뎅이가 눈에 띄듯이

이미 피투성이가 된 마음으로 내 앞에 올 때

나는 비로소 너희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시험지를 훔쳤다는 둥

답안지 점수를 몰래 고쳤다는 둥

무거운 죄목들에 눌리운 날개를 늘어뜨릴 때

우리는 서로의 상처에 몇 마디 안 잊히는 말들을 새기고

헤어졌다. 너는 학교를 그만두고

나는 다시 지루한 일상에 빠져들고

 

그러나 늘 놀란듯이 일어나

어둠 속에 떨어져 퍼득이는 우리들의 날개를 보고

결국엔 우리 모두가 너와 같았다.

살아가는 동안 보이지 않는 유리벽, 닿을 수 없는 거리

버둥거리다가 땅에 떨어져 날개가 부러지고

모가지가 비틀린 채 빙빙 돌아가는……

그러나 우리들의 말, 우리들의 날개는 유리벽 위를 날아 오르고

 

광화문을 지나며, 풀빛, 1986

 

 


 

김진경(金津經.1953.4.9∼ ) 시인

충남 당진 출생.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74년 [한국문학] 신인상 시 당선. 우신고교, 양정고교 교사. 양정고교 재직 중이던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2개월간 수감생활을 했으며, 이후 교육운동에 투신했다. [오월시] 동인. 전교조 초대 정책실장, 참교육실천위원장, 통일시대교육영눅소 소장, 계간 [교과연구] 발행인, 문학계간 [삶, 사회 그리고 문학] 발행인,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비서관, 대통령 자문정책기획위원 등 역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통일시대교육연구소 소장 역임. 2000년 12월 시집 <슬픔의 힘>으로 제5회 시와시문학 작품상 수상. 2006년『고양이 학교』로 프랑스 제 17회 앵코뤼브티블 수상. 2007 한국문학 시부문 신인상.

청소년 문학 <굿바이 미스터 하필> <우리들의 아름다운 나라>시집 <광화문 지나며>(풀빛.1986) <지구의 시간> <갈문리 아이들(청사.1984)> <우리 시대의 예수(실천문학사.1987)> <별빛 속에서 잠자다>(청비.1996) <슬픔의 힘(문학동네.2004)> 소설<이리>(실천문학사.1998) 동화집 <은행나무 이야기>(문학동네.1998) <한울이 도깨비 이야기>(우리교육,2000) <스스로를 비둘기라고 믿은 까치>(문학동네.2000)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