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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 시인 / 편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지를 부칩니다. 이제까지 쓰기는 많이 썼지만 봉투에 넣어 부치지는 못했습니다. 어린시절 저녁을 못 먹고 잠드는 밤 어머니는 몇 천 장 종이뭉치를 이고 오셨습니다. 한 장 한 장 일일이 풀칠을 하고 접어 붙이고 우리들이 지쳐서 잠든 뒤에도 어머니는 밤새워 편지봉투를 붙이셨습니다. 새벽에 만든 봉투를 이고 나가시고 한됫박 쌀을 사다 밥을 지었습니다. 밤을 새운 긴 노동 뒤에 상에 오른 한 그릇 밥을 보셨습니까. 밥알 위에 떨어지는 눈물을 보셨읍니까. 세상은 못 견디게 엄숙한 것이었습니다. 나날의 생활이 이렇게 사랑의 노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세상은 너무도 엄숙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배움이 부끄러웠습니다. 손가락이 다 해지도록 풀칠을 하는 어머니 곁에서 읽어 가는 교과서의 페이지들이 부끄러웠습니다. 아, 어머니는 늘 나의 한계였습니다. 나의 말이 사랑이 되고 노동이 되어 한 장의 봉투에 배인 어머니의 눈물을 넘어설 수 없다면 나는 영원히 아무에게도 나의 말을 건네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읍니다. 어머니는 늘 나의 결벽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노동을 넘어서지 못하는 나의 말들은 늘 나에겐 채찍이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지를 부칩니다. 편지를 부칠까 말까 망설이며 몇 걸음 걷다가 깨달음처럼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너의 말을 너의 것으로 가두는 한 영원히 사랑과 노동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내리는 눈발은 서로 엉기며 떨어져 한세상을 덮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지를 부칩니다. 이것은 사랑과 노동이 더이상 버림받지 않는 새 날을 향한 나의 노래입니다. 내가 나에게 내민 최초의 악수입니다. 아내여, 창밖엔 눈이 내리고 이 밤은 당신이 처음으로 서러운 이땅의 어머니가 되는 밤입니다.
광화문을 지나며, 풀빛, 1986
김진경 시인 / 풍뎅이
풍뎅이 한 마리가 유리창에 늘어붙어 날고 있다. 보이지 않는 유리벽,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안타까이 다리를 버둥거린다. 그렇다. 우리들의 만남은 늘 벽이었다. 아이들의 이름을 모르는 선생과 선생의 이름을 모르는 아이들이 만나는 교실.
유리창에 늘어붙어 허우적거리는 풍뎅이처럼 우리들의 말은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안타깝게 더듬거리고 늘 그랬다. 추락해서 날개가 부러진 풍뎅이가 눈에 띄듯이 이미 피투성이가 된 마음으로 내 앞에 올 때 나는 비로소 너희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시험지를 훔쳤다는 둥 답안지 점수를 몰래 고쳤다는 둥 무거운 죄목들에 눌리운 날개를 늘어뜨릴 때 우리는 서로의 상처에 몇 마디 안 잊히는 말들을 새기고 헤어졌다. 너는 학교를 그만두고 나는 다시 지루한 일상에 빠져들고
그러나 늘 놀란듯이 일어나 어둠 속에 떨어져 퍼득이는 우리들의 날개를 보고 결국엔 우리 모두가 너와 같았다. 살아가는 동안 보이지 않는 유리벽, 닿을 수 없는 거리 버둥거리다가 땅에 떨어져 날개가 부러지고 모가지가 비틀린 채 빙빙 돌아가는…… 그러나 우리들의 말, 우리들의 날개는 유리벽 위를 날아 오르고
광화문을 지나며, 풀빛,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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