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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찬 시인 / 이십원짜리 세계
팔을 디룽거리며 하오 6시 퇴근로에 선다. 24시간 중 이 시간에 저울추가 제일 무겁다.
지금 그의 주머니 안팎에 허락된 경제는 이십원 그 안에서 그는 군왕이다.
오원짜리 두 잔을 마시고 나면 그 사이 군왕의 키가 절반(折半)이 줄고 중량은 영토를 발 밑에서부터 확대시키고 있다. 이제 한 잔을 더하면 모든 것은 삼분의 일 고층건물 입구에 드리운 철문 소유를 잃은 사람은 그 앞에서 잠을 잔다. 나뭇잎은 달빛을 받아 떨고 있다. 전주(電柱)는 성자 같지만 욕망이 없어 머슴군이다.
그는 방향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십원짜리 세계는 되는 셈이다. 소리를 지른다. 욕을 하고 싶어진다. 야! 여기 아무도 없구나, 나뿐이로구나. 뭣들 하고 있어 이놈들아 하늘과 땅 사이 남의 귀는 없다. 크게 웃는다, 가로등이 따라 웃고 있다.
사람은 확실히 살 멋이 있구나. 어제 죽은 놈만 불쌍하지. 이십원짜리 세계를 살아 다음 순간을 모르면 사람은 확실히 살 만하다.
현장, 청강출판사, 1965
황금찬 시인 / 출렁거리고 있다
모두 출렁거리고 있구나 내 날개를 펴고 저 무명의 호수를 바라보며 그 위를 날고 있을 때 마음도 물결도 출렁거리고 찢어진 내의 같은 구름도 출렁거리고 있었다.
날개를 저 북극으로 돌렸으나 거기에도 출렁거리지 않는 것이 없고 다시 남극으로 날았으나 역시 거기에도 내가 바라는 것은 없었다.
그리하여 주검의 바다를 날고 있을 때 내 눈에 들어오는 고요, 그 고요, 적막이 거기에 영원히 펴지 못하는 날개를 육중한 체중으로 깔고 잠들어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출렁거리는 것이여 일찌기 북명(北溟)이 있어 한 날개의 끝을 거기에 두고 또 한 날개의 중심을 남명(南溟)에 두었으니 그리하여 출렁거리기 시작하였다.
한 번의 날개를 움직일 때마다 바람이 일어 그것으로 생명을 얻고 생명은 행동을 거느리며 살아 있는 절대한 표현이 되고 출렁거리지 못하면 생명을 잃은 저 무덤 속의 가득한 어두움 바로 그것이로다.
침엽수 거기엔 그만한 광명이 활엽수 숲 속엔 또 그만한 생명의 밝은 표상이 일렁거리고 있느니 입은 생의 표상이요 생명의 증거가 되었다. 한 조각의 잎이 정지된 상태는 살아있는 눈으론 정녕 응시할 수 없는 것 신이 이 시각에도 우리들의 생각 안의 우주 속에 호흡하고 있음을 느끼기엔 출렁거리는 저 북명이나 다시 남명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럴 때 그 절대의 대상은 비로소 가슴 안에서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이 모두에게도 출렁거림이 멎는 날이 오겠지 그러나 그것은 저 주검의 바다 육중한 체중으로 날개를 깔고 다시는 뒤척일 수 없을 때 그 시각은 바로 눈앞에 서는 것 아직 그런 생각은 이르고 먼 문 밖에 있는 것이다.
나비제(祭) 1, 백록출판사, 1983
황금찬 시인 / 탈출자 4
오늘까지 팔일째 물을 찾고 있다. 비도 오지 않는다. 하늘엔 황색 먼지가 구름처럼 덮여 있다. 어제 마지막 낙타를 잡았다. 거기에도 물이 없었다. 몇 홉의 피가 있을 뿐이다.
지금 내 피부는 나무껍질처럼 시들어 가고 타선(唾腺)이 말라 목이 탄다. 죽음의 땅에서 죽음을 거부하며 보장 없는 곳으로 굴러가고 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도 고향도 조국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생각나는 것은 혀를 적셔 줄 물이다. 그대로 빈사상태다. 내 생명의 최장시간이 십분으로 한정되었는데, 그 한정된 시간 안에서 일분일초씩 꺼져가고 있다. 내 중량은 마른 나뭇잎과 같으리라. 걷는 기능은 상실된 지 오래다. 먼지와 같이 바람에 휩쓸려 가고 있다.
사흘 굶은 사람이 잠 속에서 밥내를 맡듯 물 냄새가 난다. 내가 물가에 와 있는 것을 의식한다.
물이 있다. 반석으로 된 웅덩이에 군데군데 물이 있다. 먹고 싶지 않다. 그러나 벌써 물가로 굴러내리고 있다. 해골들이 파쇠처럼 흩어져 있다. 놀랄 것도 없고 무섭지도 않다. 풀 한 포기 없는 물가에 해골들이 원한의 열을 올리고 있다.
표지판이 있다. 내 눈을 끌기에 족한 거리다. 이 물은 독수다. 여기 해골을 보라. 마시면 십분 후다. 지금 내게 십분은 참으로 긴 시간이다. 물을 마시면 십분은 살고 안 마시면 오분 안에 죽는다.
현장, 청강출판사, 1965
황금찬 시인 / 퇴근 길에서
퇴근 길에서 만난 사람은 바다를 건너온 바람 그런 바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말이 없고 약간은 간간한 그런 소금기 바다 냄새가 가늘게 가늘게 풍겨오고 있었다.
잠시 쉴 자리를 권하고 그 빈 옆자리에 앉아 지금 막 산을 내려온 나뭇잎, 풀잎 천년 바위들의 대화를 전설의 표주박에 담아 본다.
기울어진 물통에서 쏟아지는 시간이 자정의 계곡을 향하여 흐르고 모든 날개들은 언제부터인가 마멸되어 가고 있었다.
이런 때 내게는 날개가 솟아야 한다. 두 팔을 가볍게 들어올려 은빛 눈부신 비늘 그런 조각으로 생긴 날개 금속성이 아니라도 피곤하지 않아라.
홍수에 떠다니던 노아의 배는 어느 산에 멎을까 그리고 누가 부는 피리에 방주의 문이 열릴꼬 살이 살아나는 풀이며 뼈가 살아나는 나무와 피를 다시 돌아가게 하는 물은 어디에 있는가
돌아가야 할 고향은 정오에 잠든 자연인가 문명의 강물인가? 석양 길에 섰다.
언덕 위에 작은집, 서문당,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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