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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시인 / 숨이 막힌다
모든 모습이 두려움 없이 내비치는 밤 믿을 수 있는 것은 대낮에도 안 보였는데 무엇이 나의 목을 조르는가 무엇이 밤을 넓게 길게 만드는가 지구 끝까지 뻗은 내 그림자를 지구 끝에서 째각째각 들려오는 가위소리에 파랑색 흰색 빨강색 검은색 더러운 색 변질(變質)된 색 아니 알려지지 않는 빛마저 길이가 있고 크기가 있고 높이가 있고 깊이가 있고 둥근 궁륭(穹隆)이 오랏줄로 내려앉은 둥그런 하늘 속의 비밀을 여자와 남자가 입맞추는 간격(間隔)의 비밀이며 그릇처럼 부딪치어 깨어지는 혓바닥의 여운을 아는가 두려움 없이 알려 하는가 라디오가 들어 있는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세계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볼륨을 높이는데 귓속말에 서류(書類)에 잉크방울에 풀잎에 거짓말에 진실에 눌려 있는 벌레들의 비참한 날갯소리 저널리즘의 고딕활자(活字)를 딛고 있는 발바닥의 크기를 내가 태평양(太平洋)의 거대한 파도라면 총칼 없이도 한 목소리로 밀어내겠지만 숨이 막힌다 묘(妙)하게 막힌다 죽음의 한 뼘 앞에선 아슬아슬하게 안 막힌다 빛이며 소리며 언덕 너머의 향기(香氣)며 심지어는 울음소리와 웃음소리마저 목을 조르고 죽지 않을 정도로 목을 조르고 재미를 느끼려고 어떤 일에 이용하려고 목을 조르고 있다. 숙달된 기술로 목을 조르고 있다 내 비밀한 숨결의 높낮이를 알아내려고 약점과 진리(眞理)의 힘을 억지로 눈치채려고 알아내서 또 다른 목을 조르려고
참깨를 털면서, 창작과비평사, 1977
김준태 시인 / 아내에게
아내야 값이 싸다고 수입 고추를 사오지 마라
이제 우리는 재래종 고추를 먹자 사는 일이 싱거웁고 세상이 그저 싱거웁고 가슴이 헛헛하더라도
풋고추에 된장 찍어 보리밥을 먹어보자 뭐라 해도 매운맛은 우리나라 것이 으뜸이다.
칼과 흙, 문학과지성사, 1989
김준태 시인 / 아메리카 1
얼음이 떠 있는 눈알을 바라보듯 로마와 희랍의 벼랑을 건너뛰는 토인비여 그대의 정신사(精神史)보다 더 넓은 나의 서러움, 나의 단단한 사랑은 아메리카와 배를 대고 함께 숨쉰다. 패인 발자국에 이웃이 가라앉고 손톱만한 틈마다 총소리가 새어 나오는 라디오 속으로 들어가면서 라디오 속까지 뻗은 국도(國道)를 달아나면서 저 거대한 뿌리를 들었다 놓는다 어리석고 끈끈한 싸움을 멀리한 다음 짐승의 고요한 숨을 쉬는 아메리카와 끝끝내 노오란 배를 대고 비빈다. 배를 대고 진리(眞理)에 단련의 여유를 준다. 내 차가운 허리의 나사못을 풀고 하늘과 땅이 맷돌처럼 돌아가듯 불기둥 박힌 아메리카의 전면(全面)을 보듬은 채 거대한 사랑을 숨쉬고 있다.
참깨를 털면서, 창작과비평사, 1977
김준태 시인 / 연가
들녘을 바라보라 눈으로 바라볼 수 없다면 가슴으로 가슴으로 바라보라 가슴으로 바라볼 수 없다면 뼈와 뼈를 부딪쳐서 바라보라 뼈로 바라볼 수 없다면 그대 넋의 몸부림으로 바라보라 눈보라에 뒤덮여 꿈꾸는 들녘 그러나 우리들 심장을 뒤집어쓴 들녘 오, 바라보라 들녘의 저편을! 들녘은 살아 있는 것들의 입맞춤과 그리움과 아우성의 향기로 가득하다.
칼과 흙, 문학과지성사, 1989
김준태 시인 / 열 손가락 중에 하나 간혹 피를... 원제 : 열 손가락 중에 하나 간혹 피를 흘린다는 일은 얼마나 즐거움인가
나는 이제 시골로 돌아갈까 부다 당신이 뒷발로 차버린 시골로 돌아가리라 아침 저녁으로 이슬에 젖은 풀을 베고 간혹 가다가는 나도 모르게 낫에 손가락도 베리라 풀포기를 스쳐가는 손가락에 조금씩 피가 흐를 때 그것은 얼마나 시원하고 깨끗한 즐거움인가 얼마나 아득하고 아득한 서러운 즐거움인가 송아지를 부르면서 아침 저녁으로 풀을 베면서 열 손가락 중에 하나 간혹 피를 흘린다는 일! 아 이제 나는 시골로 돌아갈까 부다 시골로 돌아가 풀베기를 하면서 그런 아픔도 맛보리라.
참깨를 털면서, 창작과비평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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