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호 시인 / 세상의 거의 모든 순간
나침반처럼 언제나 너를 향하는 것이다 이쪽 끝과 저쪽 끝에 너와 내가 있고 자침이 뱅뱅 도는 그곳에는 만질 수 없이 흐릿한 유령만이 있는 것이다
두 갈래 물줄기가 있는 것이다 숨을 쉬러 수면으로 올라온 수염고래의 그것 같은 분수처럼 흩어지며 가끔 무지개를 그리기도 했던 마음과 기억이 있는 것이다
마음의 심해에서 망각의 바다에서 해변으로 떠밀려오는 사체들이 있는 것이다 사람을 잃고 표류하는 튜브를 먼바다의 어부는 건져올리기도 하는 것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순간에 그것은 죽은 별을 바라보는 일과는 다른 슬픔이다 어제는 게릴라성 집중호우 아래서 오늘 죽은 신(神)을 만나 젖은 담배를 나눠 피운 것이다
맑게 갠 하늘 아래서는 아이들이 개미를 태우며 노는 것이다 햇빛을 한 점에 모아 불을 붙이는 볼록렌즈처럼 너를 거쳐간 시간들이 나의 거의 모든 순간에 모여 세상을 불태우는 것이다
잿더미 속에도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은 남는 것이다 어떤 그림은 아무도 손댈 수 없도록 보호된다 누구도 만질 수 없기 때문에 그 그림은 다른 그림보다 오래 살아남아 명화가 되는 것이다
내가 작은 무인도였을 때 너는 닿을 수 없이 머나먼 바다 그 바다에 살던 한 마리 물고기가 길을 잃고 우연히 나의 해안에 닿았었던 것이다
계간 『문학동네』 2019년 봄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진경 시인 / 편지 외 1편 (0) | 2020.03.12 |
|---|---|
| 황금찬 시인 / 이십원짜리 세계 외 3편 (0) | 2020.03.11 |
| 정영선 시인 / 파묻힌 사람 (0) | 2020.03.11 |
| 김혜천 시인 / 걸어가는 사람 (0) | 2020.03.11 |
| 김혜순 시인 / 납작납작 외 2편 (0) | 2020.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