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순 시인 / 납작납작
드문 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느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하느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또 다른 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1
김혜순 시인 / 눈동자 속
누군가 내 눈거풀 속 한없는 바닷속으로 한 삽 두 삽 모래를 퍼 가라앉힌 다음 눈꺼풀을 닫고 가면
바닷속에는 물이 산발치에서 산봉우리로 흐르네 비늘 돋친 새들이 산 깊이로 깊이로 날으네 깊은 곳이 높아지고 높은 곳이 낮아지네
그곳에 밤이 오면 내 죽은 할머니들이 우리들 발밑에 찬찬히 등불을 밝히고 가네 구름은 두 발 아래 맴돌고 사람들은 바닥에 창을 매다네
아버지는 바람 속에 알을 낳고 어머니들은 나뭇가지 사이에서 새끼를 기르네 그곳의 사람들은 부지런히 산맥을 길러 육지를 세우고 달을 퍼올리네
내 한없는 바닷속 그 깊은 곳에는 참 이상한 거꾸로 된 세상이 늘 깊어 있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김혜순 시인 / 담배를 피우는 시체
어디서 접시 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언제나 그 소리가 들렸다. 옆에서 죽은 여자의 전신이 망가진 기계처럼 흩어졌다. 꺼어먼 뼈 사이로 검은 독충들이 기어 나왔다.
내가 한 마리 독충을 들고 웃는다. 혹은 말을 걸어 보고 싶다. 내 진술은 여기서부터 더듬기 시작 바, 방에는 검은 독충들이 더, 듬, 으, 며 흩어지고
어리고 섬찌ㅅ한 금을 긋는다. 내가 죽은 여자의 입술을 주워서 담배를 물려 준다. 그러다가 이내 뺏아가고 다시 물려 준다. 불이 우는 것 같다. 어디서 복숭아 냄새가 난다.
시(詩)속에 사닥다리라는 말을 넣고 싶다. 사닥다리를 든 내가 계단에서 서성거린다. 창문이 열리고 흰 스카프를 쓴 죽은 여자의 얼굴이 걸려 있다. 아, 아직도 접시 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또 다른 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1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영선 시인 / 파묻힌 사람 (0) | 2020.03.11 |
|---|---|
| 김혜천 시인 / 걸어가는 사람 (0) | 2020.03.11 |
| 김초혜 시인 / 문둥탈춤 1 외 4편 (0) | 2020.03.11 |
| 김창완 시인 / 첫눈 오는 밤에 외 1편 (0) | 2020.03.11 |
|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14 외 2편 (0) | 2020.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