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14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1.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14

 

 

나는 문을 열어주지 않기로 했어

뜨거운 모랫바람

햇살에 잘 익은 청동빛 근육

깊고 깊은 바다에서 해신(海神)들이 울리는

종소리마저도

오늘은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어

깨질지언정 열리지 않는

석회질 속에 깊이 감춘 슬픔 때문에

나는 걸어갈 수 없었어

말하지 말라 말하지 말라

지킬 것 하나 없는 빈 공동(空洞)에

우리의 슬픔은 하얗게 진주로 굳어지고

갯흙바닥에 나뒹굴며

나는 결코 문을 열지 않기로 했어

안개를 걷으며 무적(霧笛)을 불며

그대 내 조가비의 햇살로 닿을 때까지

오늘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어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15

 

 

에게해(海)는 청람빛,

삶과 죽음의 일천 겁 물굽이를 돌아

포세이돈 신전에 와서 나는 나의 바다를 비워내다

해신(海神)들이 울리는 아침 종소리는

어디에서도 울려오지 않았지만

귤빛 젖가슴을 드러낸 그리스 소녀가

에게해(海)를 지키고 있었다

지진과 바다를 관장하는 포세이돈,

나는 아직 그를 만나지 못했지만

오늘 그가 지키는 청람빛 바다에

잠시 닻을 내리다

바람은 머리칼을 날리며

대리석 신전의 일만 년 허적(虛寂)을 뒤적이지만

포세이돈, 그대만은 알리라

내가 숨기고 있는 한(恨)과

내 해저에 잠복한 큰 지진을 그대만은 알리라

에게해(海)는 청람빛,

포세이돈 신전에 와서 잠시 정박하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16

 

 

갠지스강(江) 물 위에 촛불을 띄웠다

황토물에 몸을 씻는 고행자의 기구(祈求)를

갠지스강(江)은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늙은 갠지스강(江)이 인도를 안고 잠들었을 때에도

동방의 지혜로운 빛은 강물 위에 넘실거렸다

형제여, 나는 타고르의 음성을 들었다.

형제여,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붉은 천에 묶은 2구의 시신이

물가로 걸어나왔다.

죽은 자의 흰 뼈가 가라앉고

허무 사이로 빠지는 바람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고별을 받아들였다

갠지스강(江) 물 위에 촛불을 띄우며

기우뚱기우뚱 삐걱거리며 흘러가는

이방인의 서툰 노질마저도

그녀는 부드럽게 품어 주었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김종해 시인

김종철 시인의 형으로 부산에서 태어난 김종해는 1963년 『자유문학』 신인상에 시 「저녁」이 당선되고, 이어 1965년 『경향신문』 신춘 문예에 시 「내란(內亂)」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다. 1966년 첫 시집 『인간의 악기(樂器)』를 펴낸 그는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한다. 그는 이 뒤로 시집 『신의 열쇠』(1971) · 『왜 아니 오시나요』(1979), 장편 서사시 『천노(賤奴), 일어서다』(1982), 시집 『항해 일지』(1984) ·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1990) · 『별똥별』(1994) 등을 펴낸 바 있다. 그는 1982년에 ‘현대 문학상’을 받은 데 이어 1985년에 ‘한국 문학 작가상’ 한국시협회상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