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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금찬 시인 / 어느 나무의 사연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0.

황금찬 시인 / 어느 나무의 사연

 

 

물오른 가지마다

터져나는

생명의 함성들

 

천 년이 내려앉은

낡은 기왓장도

이끼는 빛을 찾고 있다.

 

하늘가엔

이기고 돌아가는 깃발들이

저리도 휘날리는가.

 

빈 가지

해무리의 여운도 없고

새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는다.

 

약동의 행렬이

강이 되고

찬란한 하늘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오후의 한강, 1973

 

 


 

 

황금찬 시인 / 어느 초상화

 

 

저녁에 쓸어 놓은 뜰에

밤새 낙엽이 쌓여

아침에 발 놓을 곳이 없다.

 

나는 발 끝으로 낙엽을 밀며

아침 뜰을 거닐다가

문득 생각나는 말.

 

낙엽이 밟혀 부서지는 소리를

마음으로 들을 줄 알게 되면

그때 이마 위에 쏟아지는 햇살도

초지장 같으리라.

 

누구의 초상화인가.

지금도 펄펄 날려 내린다.

 

그것은 지전에 그린

율곡이나

세종대왕의 그림은 아니다.

 

역사 어느 구석에도

적혀 있지 않고

내 기억에만 남아 있는

얼굴과 얼굴들.

 

어쩌면 내일의

내 얼굴이다.

 

웃지 않는다.

낙엽에 그려진 나는

웃지 않는다.

 

세월도 나와 같이

가는 것일까

유리잔에 담아둔 물.

 

시간은 바위

초상화 조각들은

바위 얼굴에 흩어져내린다.

 

산새, 종로서적, 1975

 

 


 

 

황금찬 시인 / 연초밭 머리에 서면

 

 

뜰 앞 하루갈이에

담배를 심었다.

담배잎은 시집 가기 전

내 누님이 쓰시던 키와 같다.

 

곰방대를 무시고

담배밭의 풀을 뽑으시는

할아버지는

약 오른 담배잎을 연신 쓸어 보신다.

 

담배밭에 비가 내린다.

빗소리는 흡사 한밤중

파초잎에 내리는 빗소리처럼

후둑거린다.

 

할머니는 담배를 `담바귀'라 불렀고

할아버지는 담배를 `망우초'라 하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담배를 `연초'라 하시네.

 

창문을 열고

먼 산을 바라보며

파고다 연기를 뿜어 보라.

이것은 큰형님의 말이다.

 

적진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며

눈 날리는 고지에 서서

화랑 담배의 연기를 날린다.

이것은 작은 형님의 말이다.

 

새벽잠이 오지 않을 때

담배 없으면 `우야노'

이것은 누구의 말일까.

 

연초 밭머리에 서면

흘러간 음성들이 그립다.

 

구름과 바위, 선경도서, 1977

 

 


 

 

황금찬 시인 / 오늘에 앉아서

 

 

그리우면 만나야지

만나도 외로우면

울어야 한다.

 

푹 꺼진 겨울 바다 위에

계절을 잃은 국화 한 송이가

병들어 있다.

 

아침마다 짖던 까치는

지금 어느 나뭇가지로

날아갔을까.

 

출근 길에 눈이 온다.

이 나이에 오는 눈은

추억의 등불이 되어

어제를 불켜고 있다.

 

누군가 부르는 듯한데

그 소리의 방향을

찾을 길이 없다.

 

무한한 과거와

영원한 미래의 그 중간

오늘에 앉아 있다.

그것이 한없는 고독이다.

 

오후의 한강, 1973

 

 


 

황금찬 시인(黃錦燦 1918년-2017년)

1918년 강원 속초시 출생. 1947년 ,새사람>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하였고 1951년 시 동인 '청포도'를 결성했다. 1953년 <문예>지에 <경주를 지나며>가 추천되어 정식으로 등단했다. 1965년 첫 시집 <현장>을 낸 이후 2008년 <고향의 소나무>까지 거의 매년 시집을 낼 정도로 왕성한 창작을 해왔다. 1948~78년에 강릉농업고등학교, 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했고, 1978~80년 중앙신학대학 기독교문학과 교수, 1980년~94년에는 추계예술대학, 숭의여자전문대학, 한국신학대학에서 강의했다. 1996 대한민국문학부문문화예술상. 1992 문화의 달 보관문화훈장. 1990 서울시 문화상. 1982 한국기독교 문학상. 1973 월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