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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찬 시인 / 어느 나무의 사연
물오른 가지마다 터져나는 생명의 함성들
천 년이 내려앉은 낡은 기왓장도 이끼는 빛을 찾고 있다.
하늘가엔 이기고 돌아가는 깃발들이 저리도 휘날리는가.
빈 가지 해무리의 여운도 없고 새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는다.
약동의 행렬이 강이 되고 찬란한 하늘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오후의 한강, 1973
황금찬 시인 / 어느 초상화
저녁에 쓸어 놓은 뜰에 밤새 낙엽이 쌓여 아침에 발 놓을 곳이 없다.
나는 발 끝으로 낙엽을 밀며 아침 뜰을 거닐다가 문득 생각나는 말.
낙엽이 밟혀 부서지는 소리를 마음으로 들을 줄 알게 되면 그때 이마 위에 쏟아지는 햇살도 초지장 같으리라.
누구의 초상화인가. 지금도 펄펄 날려 내린다.
그것은 지전에 그린 율곡이나 세종대왕의 그림은 아니다.
역사 어느 구석에도 적혀 있지 않고 내 기억에만 남아 있는 얼굴과 얼굴들.
어쩌면 내일의 내 얼굴이다.
웃지 않는다. 낙엽에 그려진 나는 웃지 않는다.
세월도 나와 같이 가는 것일까 유리잔에 담아둔 물.
시간은 바위 초상화 조각들은 바위 얼굴에 흩어져내린다.
산새, 종로서적, 1975
황금찬 시인 / 연초밭 머리에 서면
뜰 앞 하루갈이에 담배를 심었다. 담배잎은 시집 가기 전 내 누님이 쓰시던 키와 같다.
곰방대를 무시고 담배밭의 풀을 뽑으시는 할아버지는 약 오른 담배잎을 연신 쓸어 보신다.
담배밭에 비가 내린다. 빗소리는 흡사 한밤중 파초잎에 내리는 빗소리처럼 후둑거린다.
할머니는 담배를 `담바귀'라 불렀고 할아버지는 담배를 `망우초'라 하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담배를 `연초'라 하시네.
창문을 열고 먼 산을 바라보며 파고다 연기를 뿜어 보라. 이것은 큰형님의 말이다.
적진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며 눈 날리는 고지에 서서 화랑 담배의 연기를 날린다. 이것은 작은 형님의 말이다.
새벽잠이 오지 않을 때 담배 없으면 `우야노' 이것은 누구의 말일까.
연초 밭머리에 서면 흘러간 음성들이 그립다.
구름과 바위, 선경도서, 1977
황금찬 시인 / 오늘에 앉아서
그리우면 만나야지 만나도 외로우면 울어야 한다.
푹 꺼진 겨울 바다 위에 계절을 잃은 국화 한 송이가 병들어 있다.
아침마다 짖던 까치는 지금 어느 나뭇가지로 날아갔을까.
출근 길에 눈이 온다. 이 나이에 오는 눈은 추억의 등불이 되어 어제를 불켜고 있다.
누군가 부르는 듯한데 그 소리의 방향을 찾을 길이 없다.
무한한 과거와 영원한 미래의 그 중간 오늘에 앉아 있다. 그것이 한없는 고독이다.
오후의 한강,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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