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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미령 시인 / 구부정하고 초조한 빛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0.

김미령 시인 / 구부정하고 초조한 빛

 

 

서로 꽉 껴안고 있어서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팔이 다리를 감고 다리가 어깨를 감싸고 있다

두 몸이 하나로 뭉쳐져 머리가 어느 가랑이 사이에 끼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떨어진 책을 엎드려 줍지도 못한다

껴안은 채 그냥 다른 이야기를 짓자 우리가 모르는 다른 세상 이야기

껴안은 채 가슴 앞에서 채소를 키우고 개도 키우는 이야기

당신이 첫 문장을 시작하면 나는 다음 문장을 이으면서

함께 종종거리다

발이 엉겨 쓰러지기도 하면서

 

겨우 일어나보면 따로 떨어져 있어 깜짝 놀라겠지

그러면 얼른 다시 부둥켜안자

이 자세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자

서로의 체액을 흔들어도 좋다

흔들다 지치면 햇빛 아래 쉬다가 어디론가 공처럼 굴러가도 좋다

당신의 발로 내 얼굴을 씻고

내 손으로 당신의 구멍을 간질이면서

서로에게 남아있는 여백을 비틀어 그곳에 작은 의자라도 놓으면 좋을 것이다

바람이 머물다 가고 새가 앉았다 가고

구름이 오고 비가 오고

 

물을 친다

무엇으로든 친다

간헐적인 깜빡임으로 우리의 맞붙은 심장 소리로

손가락을 뻗어 구름의 바닥을 칠 수 있다면 어디든 우리 기별을 전할 수 있겠지

우리 사이에 남아 있는 물을 다해 물이 북이 되어

먼 흙의 아가미가 부풀고

늦은 잠의 덧문이 들썩일 때까지

살과 살 사이에 갇힌 비들이 웅성이며 범람하기 시작하고 꽉 껴안은 자리가 헐거워지면

묶여있던 팔 다리가 스르르 풀려나 어느새 물 사이를 헤엄쳐 다니면서

 

계간 『모:든 시』 2019년 봄호 발표

 

 


 

김미령 시인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파도의 새로운 양상』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