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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인 / 그곳 1
그곳, 불이 환한 그림자조차 데리고 들어갈 수 없는 눈을 감고 있어도 환한 잠 속에서도 제 두개골 펄떡거리는 것이 보이는, 환한 그곳, 세계 제일의 창작소 끝없이 에피소드들이 한 두릅 썩은 조기처럼 엮어져 대못에 걸리는 그곳, 두 뺨에 두 눈에 두 허벅지에 마구 떨어지는 말발길처럼 스토리와 테마들이 만들어져 떨어지는 그곳, 밖에선 모두 칠흑처럼 불끄고 숨죽였는데 나만 홀로 불켠 조그만 상자처럼 환한 그곳,
어느 별의 지옥, 청하, 1988
김혜순 시인 / 그곳 2
채찍으로 내리치지 않아도 나는 발가벗긴다 발가벗긴 내 위로 물이 내린다. 안개가 쏟아진다. 이슬이 맺힌다.
다음―아버지들이 나온다 나와서 내 몸 밖에 커튼을 친다 비단처럼 보드라운! 그러나 강철 커튼! 솜처럼 푹신한! 그러나 이불보다 더 두꺼운! 다음―말씀의 채찍으로 내리친다 다음―잉크를 먹인다 몸통 가득 잉크가 차올라온다.
드디어 발가벗기고 매맞고 무거운 이야기를 옷인 양 입고 몸 위로 가득 글씨를 토하고야 만다 수세기 전에도 했던 비밀의 그 예언을. 몸 전체에 불길을 매단 채.
어느 별의 지옥, 청하, 1988
김혜순 시인 / 기다림에 관하여
나의 딸아이 망원경 사달라고 하도 졸라서, 내가 단호하게 안 돼 돈 없어 했더니 내 딸이 나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엄마라고 안 부를 거야 아줌마라고 부를 거야 그래 내가 그래 그래 바라던 바야 했더니 아니 그럼 이제 할머니라 부를 거야 그래 내가 그래 그래 바라던 바야 했더니 다시 좋아 진짜 증조할머니라고 부를 거야 그래 다시 내가 그래 그래 바라던 바야 했더니 아니야 이제 진짜 웅녀라고 부를 거야 그래 내가 위가 아파서 마늘은 못 먹지만 할 수 없지 뭐 그랬더니 이번엔 진짜야 하등 동물이라고 부를 거야 그래 내가 그거 말고 별이라고 불러줘 그 모든 할머니의 엄마는 별이니까 했더니 망원경으로 엄마는 안보여 엄마는 내 별이 아니란 말이야 엉엉 운다
학교의 소설가 선생님과 부소산성 거닌다 선생님 낮에는 왜 별이 안보이지요 여기가 너무 밝아서 그렇지요 선생님 낮에 별이 보인다면 어떻게 보일까요 어둡겠지요 선생님이 부서진 기왓장 하나 주우시며 백제 때 기와일까요 환하지요 하신다 잠든 시체에서 요 위로 구더기들이 기어 나온다 구더기들이 내 눈꺼풀 위까지 올라온다 돌아누울 때 그의 말 들린다 아프지 말고 기다려요 기다리란 그 말에 모든 구더기들 날아 오른다 수백 마리 파리떼가 잠든 시체 주위를 윙윙거린다 너무 가까운 은하수처럼 기다려요 기다려요 파란 소리들이 잠 못 든 시체를 감싸고 돈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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