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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10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0.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10

 

 

노를 젓다가 기진맥진한 종로 뒷골목에서

우리는 흡반을 길게 드러내 놓고 서로 엉겼다.

포장술집에서 우리는 밧줄을 잡아당기며

부담없이 정박하기 위해

한 잔, 한 잔, 한 잔을 붓고 또 부었다.

너도 나에게 열어 주지 않았고

나도 너에게 열어 주지 않았던

우리의 단단한 껍질이 뜨겁게 달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지키기 위해

맞물고 있는 두 개의 껍질,

상처받지 않으려는 조심조심조심 때문에

우리의 낱말 위에 새로 돋아난 단단한 조가비

그 속에서 우리가 숨기고 있는 슬픔이야

하얗게 진주가 되든지 말든지

가슴 아픈 소금이 되든지 말든지

오늘은 노를 젓다가 기진맥진한 종로 뒷골목에서

우리는 흡반을 길게 드러내놓고 서로 엉겼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12

 

 

조선소의 전기용접공 김씨는 평소 말이 없다.

그가 사용하는 말이란

그가 하루 종일 땜질하는 용접봉의 숫자보다 적다.

용접공 김씨가 하는 일이란

도크 안으로 들어온 폐선의 내장을

새것으로 바꿔 끼우는 일이다.

빨갛게 녹슬은 쇠붙이에 불을 당기고

그가 든 용접봉이 적개심으로 이글거릴 때

그의 언어는 불꽃으로 나타난다

용접공 김시가 절단기를 들고 일하는 날은

바다는 흰 파도를 거칠게 물었고

해저의 먼 산악은 우뢰 소리를 내었다.

그가 사용하는 용접봉은

전류의 충전으로 불꽃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숨기고 있는 한(恨)으로 불꽃을 점화시킨다

그는 자신의 한(恨)을 숨기고 있었지만

젊은 나의 눈엔 그것이 보였다

 

이십오 년이 지난 지금

그의 항해가 끝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소의 전기용접공 김씨가 든 그 용접봉이

종로 뒷골목의 거친 물목을 항해하는

나의 손에 어느 날 문득 쥐어져 있었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13

 

 

시인들은 서울의 수위(水位)가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그리고곧 해일이 일어나 바람 한점 없는 평온한 이 도시가 침몰될 것이라고 얘기들을 했지만, 정작 그들은 지진의 진앙지를 어디라고 꼬집어 말하지는 않았다. 이 도시의 밑바닥에서 그물을 던져 살아가고 있는 하찮은 수부(水夫)인 나는 밑바닥에서 울렁거림과 부르짖음과 그날그날의 흔들림을 잘 알고 있다. 지진의 진앙은 해저의 어느 곳에 잠복된 지층의 엇갈림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해저가 아닌 더욱 다른 의미의 지층간의 엇갈림 때문이란 것을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단지 하찮은 수부(水夫)에 지나지않으므로 형이상학적 진단을 내릴 수 없었다.

 

오늘도 약간의 미진이 또 있었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김종해 시인

김종철 시인의 형으로 부산에서 태어난 김종해는 1963년 『자유문학』 신인상에 시 「저녁」이 당선되고, 이어 1965년 『경향신문』 신춘 문예에 시 「내란(內亂)」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다. 1966년 첫 시집 『인간의 악기(樂器)』를 펴낸 그는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한다. 그는 이 뒤로 시집 『신의 열쇠』(1971) · 『왜 아니 오시나요』(1979), 장편 서사시 『천노(賤奴), 일어서다』(1982), 시집 『항해 일지』(1984) ·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1990) · 『별똥별』(1994) 등을 펴낸 바 있다. 그는 1982년에 ‘현대 문학상’을 받은 데 이어 1985년에 ‘한국 문학 작가상’ 한국시협회상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