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남조 시인 / 정물(靜物)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0.

김남조 시인 / 정물(靜物)

 

 

그림 속의 배는

그려진 물결 위를 흐른다

청남빛 수심(水深)

만경창파도

물빛깔 못 적시는

눈시린 흰 배

 

액자 안의 사람은

유리칸막이를 치고

세월 하나 안 탄다

은(銀)의 압침(押針)으로

진작에

심장의 소요를 꺼 버리고

아아 마음이 깊이 잠든 때

넘쳐 부푸는 고요.

 

이들이

주인의 자리를 지키는 길목을

삶의 먼 나그네길

고통의 즙(汁)을 흘리면서

한 여자가

지나간다

 

빛과 고요, 서문당, 1982

 

 


 

 

김남조 시인 / 제야(除夜)

 

 

지금은 잊어버리는 시간이다

잊음을 염하여 눈을 감는 시간이다

부끄러운 이의 기도 시간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

그 조마로운 마지막 시간인데

내 마음을 비워

철철 넘치도록

눈물이나 담아 보랴

 

이를테면

나는 해 묵은 편지

보낼 곳에 보내지 못한 채 어언 빛 바랜

봉함 속 기찬 사연을

품기도 했네마는

 

지금은 다시

기다려 보는 시간이다

 

젖은 눈으로 묵례를 나누면서

당신과 내가, 저분과 그이가

새론 기다림에 머리 숙이는 시간이다

 

오는 건 매양 같은 것이라 해도

어쩌면 더욱 나쁜 것이라 해도

씻은 손으로 새 것을 맞아 들이

필부(匹婦)의 낭만이여

 

정념의 기, 정양사, 1960

 

 


 

 

김남조 시인 / 축성(祝聖)의 첫 인(印)을

 

 

눈이여 오렴

날개를 접은 희디하얀

정적(靜寂)이여 오렴

잠들어 계신

어린 하느님을 위하여는

부푸는 큰 고요가 있어야겠어

밤에도 보이느니

살아서 반짝이는

흰빛이여

기쁨이여 오렴

드리고 싶어

드리고 싶어

영혼의 쓸쓸함을 알던

그날부터

눈물에 씻기우는

나의 노래 모두

드리고 싶어

 

가슴은

알맞게 식고

알맞게 따뜻하여

둘이 있거나

혼자 있는 형편에

자유로와지고

이제 소망인 건

양(羊)떼위에

구름 이우는

눈발

 

눈이여 오렴

마음의 마음이 갈구하는

천상(天上)의 수분(水分)

온땅을 적셔주렴

축성(祝聖)의 첫 인(印)을 주렴

주 찬미 찬미의

소리없는 갈채 울려 주렴

눈이여 오렴

 

빛과 고요, 서문당, 1982

 

 


 

 

김남조 시인 / 편지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내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설일, 문원사, 1971

 

 


 

 

김남조 시인 / 하일(夏日)

 

 

날이 날마다

섬세한 날개짓으로 날아가고

돌아오는 새야

 

비 속에도

번개 속에도

산탄(散彈)처럼 내닫더니

오늘은 날개를 접어

 

한더위 긴긴 해

고단한 하루

부채로 바람을 일구어

눈썹이 시원한

아가는 잠들어

 

아무 일도 없는데

초록이 무거워서

솔잎 하나마저도 흔들지 못하는

나무, 나무, 나무들

마법의 고요

 

소나기 같이 온

현기증에

이마를 짚고 서면

 

새야

새야

내 영혼 그 안에서

사막을 가는구나

 

김남조 시전집, 서문당, 1983

 

 


 

김남조(金南祚, 1927.9.26~  ) 시인

1927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 졸업. 1953년 첫 시집 《목숨》으로 등단. 시집으로 『목숨』, 『나아드의 향유』, 『나무와 바람』, 『정념의 기』, 『풍림의 음악』,『겨울 바다』, 『설일』, 『사랑 초서』, 『동행』, 『김대건 신부』, 『빛과 고요』, 『바람 세례』, 『평안을 위하여』, 『희망 학습』 등과 수상집 및 콩트집 『아름다운 사람들』외 다수가 있음. 자유문인협회상(1958), 오월문예상(1963), 시인협회상(1974), 국민훈장 모란장(1993년), 대한민국예술원상(1996), 은관문화훈장(1998), 만해대상(2007) 등을 수상.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한국시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역임. 현재 숙명여대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