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영 시인 / 수택(手澤)*의 기록
희미한 과거는 종이에 묻은 사람의 지문을 닮았다 동심원 한 쪽이 무너졌기에 옛사람들의 행적을 찾는 일은 그래서 더 궁글고 아득하다 그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시간을 일일이 백지에 옮겨 적는 선유(先儒) 중심에서 멀어지는 생각들이 조급해진 붓놀림을 재촉하고 종횡무진, 뻗어가는 이야기를 쫓느라 그의 낮과 밤은 점점 짧아진다 무뎌진 직관과 유순한 이성이 되살린 숨소리를 잡아두느라 붓의 깃이 닳고 벼루에 구멍이 났다 태도의 흐름을 안쪽으로 모으고 틀림과 다름의 갈래를 짚어내느라 대하의 방점을 한참동안 미뤄둔 지 오래 사료를 모으고 실증을 더할수록 근본 없는 속설은 갈피 밖으로 밀려나고 책 모서리마다 둥글게 닳은 지문이 생겼다 길고 긴 시간의 책장 속을 수없이 뒤채었을 순암*의 손자국들 20권 20책, 동사강목으로 역사의 오롯한 인장이 되었다
*수택(手澤): 손이 자주 닿았던 책이나 물건에 손때가 묻어서 생기는 윤기 *순암(順菴): 안정복의 호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남조 시인 / 정물(靜物) 외 4편 (0) | 2020.03.10 |
|---|---|
| 황금찬 시인 / 수목을 보며 외 3편 (0) | 2020.03.09 |
| 김예강 시인 / 기다림의 분위기 외 2편 (0) | 2020.03.09 |
| 오태환 시인 /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0) | 2020.03.09 |
| 김창완 시인 / 어느 시인(詩人)에게 외 2편 (0) | 2020.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