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황금찬 시인 / 수목을 보며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9.

황금찬 시인 / 수목을 보며

 

 

정원에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오월이 가져오는 살결 같은 색깔을 전신에 받으며

의사(義士)의 의지처럼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다.

 

원정(園丁)들은 지혜로운 수목 속에 앉아서

나무들의 속삭임을 듣고 있는지

스스로 마음을 열지 않으면

천금으로도 손꼽을 수 없는

수목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는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거기에 꽃이 피고 열매가 열고

한가로운 오후에 구름이 잠시 가지 끝에

쉬었다 가는 것을 보고 싶어

원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어머니는

과실을 먹고는 그 씨를 반드시

땅에 묻는 교훈을 남기었다.

`우리들이 가고 없는 먼 훗날

이 땅의 권리를 이어받을

우리들의 후손들이

그 무성한 나무그늘 밑에서 땀을 쉬고

익은 열매를 마음껏 따먹게 하라.'

어머님은 갔다.

 

그러나 어머님이 심어놓고 간 나무들은

이 해에도 오월을 맞아

그 무성해 가는 잎을

우리들의 상징처럼

바람에 날리고 있다.

 

나무가 늙으면

다시 새로운 나무가 자라

이 땅에서 영원히 축복을 받으며

대를 이어 살아갈 우리들의 후손……

 

아, 나는 오늘 알 것 같다.

나무를 심고 기르는 원정들의

그 노고와 진심을

아침이 밝아 오듯이 알 것 같다.

 

구름과 바위, 선경도서, 1977

 

 


 

 

황금찬 시인 / 아직도 먼 길

 

 

이 길이 어디서 멎을까

그 끝을 나는 모르고 시작했고

또 모르는 채 끝날 것이다.

 

시작은 어디에서

끝은 어디로

이것은 내가 알 수 있는 이치가

아니고 다시 나 아닌 누구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온 길을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갈 길을 살피지 말라

그것은 이미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지금 나는 이곳에 서 있다.

 

어제에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내일에 살 약속도 없는 것

지금 바로 여기

이 순간에 내가 있을 뿐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지금 이름 모를 새가

바라보이는 나뭇가지에 앉아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다.

 

그 새는 어느 곳에서 날아왔는지

이제 어느 곳으로 날아가야 하는가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날아온 곳과

다시 날아갈 곳을 잊으려는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인가.

 

새는 지금 해야 할

자기의 행동을 스스로 묻고

그 해답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인습에 젖게 하고

관습의 굴레를 강요하며

남들이 걸어간 길 외엔

다시 길이 없다고 날세운다.

만약 다른 길을 택하면

그것은 정도가 아니라

이도라고 웅변 이상의 웅변으로

외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오늘의 망설임과 무능을

강요하고 있는가

저 새가 오늘의 행로를 자유롭게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저렇게 고민에 젖어 있음은

인습의 굴레에 사로잡혔고

그 올가미에 얽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할까,

어제가 진정으로 있었고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내일은 또한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조롱이 되고

새는 언제부턴가 그 조롱에

갇히어 있다.

 

그 조롱의 성벽은

새의 힘으로도 밀면 능히

허물어 버릴 수도 있다.

그저 새의 힘보다는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오늘의 새는

이 조롱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조롱은 새의 원수가 아니고

보호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새를 가두는 조롱이다.

잊어버려야 한다. 오늘 그외 것은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

 

나비제(祭) 1, 백록출판사, 1983

 

 


 

 

황금찬 시인 / 아침

 

 

아침을 기다리며 산다.

지금은 밤이래서가 아니고

아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침을 맞으면

또 그 다음의 아침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없이 많은 아침을

이미 맞았고 또 맞으리

하나 아침은 기다리는 것이다.

 

이미 맞은 아침은

아침이 아니었고

이제 맞을 아침이 아침일 것 같다.

 

아침을 기다리는 것은

그 아침에 날아올

새 한 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언덕 위에 작은집, 서문당, 1984

 

 


 

 

황금찬 시인 / 아침 기도

 

 

아침의 기도는

영혼을 일깨우는

그런 간곡한 마음으로 드린다.

 

동산 위에

석양처럼 꿇었던

그 고독했던 무릎

절대한 사랑을 생각한다.

 

당신의 섭리를 깨닫고

그 섭리 안에서

이 하루를 살게 하여 주시고

 

마음 속

어느 그늘에서

잠자고 있는

나의 선한 행실을

이루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배워

그 시간이 비록 짧을지라도

나의 이웃의

몸이 되게 하여 주시고

 

내 머리 위에

저녁의 구름처럼

어두움이 내릴 때

나로 하여금 웃게 하시고

울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기도의 마음 자리, 성서교리간행회, 1981

 

 


 

황금찬 시인(黃錦燦 1918년-2017년)

1918년 강원 속초시 출생. 1947년 ,새사람>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하였고 1951년 시 동인 '청포도'를 결성했다. 1953년 <문예>지에 <경주를 지나며>가 추천되어 정식으로 등단했다. 1965년 첫 시집 <현장>을 낸 이후 2008년 <고향의 소나무>까지 거의 매년 시집을 낼 정도로 왕성한 창작을 해왔다. 1948~78년에 강릉농업고등학교, 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했고, 1978~80년 중앙신학대학 기독교문학과 교수, 1980년~94년에는 추계예술대학, 숭의여자전문대학, 한국신학대학에서 강의했다. 1996 대한민국문학부문문화예술상. 1992 문화의 달 보관문화훈장. 1990 서울시 문화상. 1982 한국기독교 문학상. 1973 월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