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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예강 시인 / 기다림의 분위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9.

김예강 시인 / 기다림의 분위기

 

 

마치 열매가 익어가는 나무 아래서의 이야기인 듯

당신은 묵묵히 서 있다

 

구조가 뒤죽박죽인 채 서 있다

 

몸속에 시계를 키우는 당신은

당신이 잠든 사이 당신을 찾는다

 

두 팔을 옷 속에 넣고

두 다리를 끌어안고

 

눈귀를 막고 입술을 닫고

 

골목을 걷는,

열 개의 골목이 열한 개의 골목이 된다

 

열한 개의 골목이 열두 개의 골목이 된다

열두 개의 골목이 열세 개의 골목이 된다

 

당신이 잠든 사이

열매가 익어가는 나무 아래서

 

불을 켜둔 집들 사이

대문을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

 

시집『오늘의 마음』(시인동네, 2019) 중에서

 

 


 

 

김예강 시인 / 채광창

 

 

구두를 벗어 말린다

생은 여기까지라던 12월

 

기둥이 없이 떠 있는 방

너는 매일 건축을 생각했다

열어둔 서랍인 듯

햇빛 드는 집이 건축된다고

너는 말했다

야트막한 언덕 집은

강의 서랍처럼

입구에 새가 와서 앉는다

 

지상의 언덕에서 자꾸 꽃이 핀다

12개의 채광창이 생화처럼 피는

일 년은 따스할 것이다

빛의 속기를 누가 읽을 수 있나

흰 수염을 털며 총알을 장전하던 햇빛

오래 달려온 햇빛

이마와 눈이 다 늙은 채

방아쇠를 당긴다

우리는 페허에서 또 페허가 되어

모든 것이 고요해진다

 

텅 빈 집의 바닥에 당신이 앉는다

명중되기까지 몇 번이나 생은

몸을 바꾸는가

집은 미완인 채 우리를 찾는다

당신이 돌아온다 우리를 찾는다

 

월간 『시인동네』 2019년 11월호 발표

 

 


 

 

김예강 시인 / 코스모스 사랑

 

 

방탄벽 코끼리가 되었네

사막을 걸어가도

두렵지 않아

 

길 위

집을 세우는 가벽

꽃이 핀다

가벽 안에 가벽일지라도

쓰러지지 않아

서 있어 준 길 위

꽃이 핀다

 

출렁이는 리듬 속

눈물을 닦아주던 한 장 손수건

흔들리네

 

우리들은 아주 조금씩

떠오르는 기분을 가졌어

 

너의 공동체가 되어가고

오늘 걸어보기로 한다

 

길 위에 우리가 버리고 싶었던 집이

여기 있네

우주에 안긴 우주

쉬시고 가시라

 

사람아

 

계간 『발견』 2019년 가을호 발표

 

 


 

김예강 시인

부산교육대학교 및 同 대학원 졸업. 2005년《시와 사상》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고양이의 잠』과 『오늘의 마음』이 있음. 2019년 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과 계간 『시와 사상』 편집장 역임. 현재 한국시인협회, 한국작가회의, 부산작가회의 회원이며 계간 『시와 사상』 부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