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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시인 / 빈 항아리 앞에서
아가야 이제 우리는 빈 항아리라도 들여다보자 김치와 깍두기를 담았던 항아리 해마다 된장과 소금과 고추장을 담아 놓았던 항아리 언젠가 텅 비어 버린 항아리를 우리는 그러나 들여다보자
산 너머 마을 강을 건너 또 마을 어머니들이 자식에게 젖꼭지를 물리는 곳 삼수 갑산에 바람이 불고 사방팔방에 세월이 흩날리고
아가야 우리 아가야
너의 엄마 몰래 빈 항아리를 들여다보는 이 우중충한 아빠를 너는 바보라고만 짜증내지 말아라 소용없는 일이라고만 짜증내지 말아라
빈 항아리 속일망정 아아, 그렇다 빈 항아리 속일지라도 혹시 우리 집이 가야 할 길이 너와 내가 가야 할 길이 뚫려 있을지 모른다
아가야 우리 아가야 지금 우리는 빈 항아리라도 들여다보며 멀고 아득하게만 뚫려져 있을 우리의 갈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렇지, 응! 그렇지, 응!
국밥과 희망, 풀빛, 1984
김준태 시인 / 사람사랑운동시(詩)
참 그랬었다 어릴 적에 나는 호랑이가 무서웠다 늑대가 무서웠고 귀신이 무서웠고 밤이면 도깨비가 된다는 빗자루 몽둥이가 무서웠다
참 그런데 달라졌다 어른인가 껍질인가 되어서는 사람이 무섭고 무서워졌다 해바라기 이글대는 대낮은 물론 아내와 함께 걷는 달밤이어도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다
참 그런데 또 달라졌다 시를 쓰며 혼자 울다 보니 시를 쓰며 어우러져 살다 보니 그런 저런 눈빛과 따스함을 섞다 보니 사람이 이제 더없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어쩌면 내가 사람이 되지도 못할 것만 같아 논길이나 산길, 혹은 광주나 부산 서울의 숱한 거리의 사람들이 꽃처럼 이쁘고 향기로웠다
아 생살의 사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하루도 뿌리칠 수 없는 사람의 피와 사람의 꿈의 어우러짐! 그리고 몸살처럼 달아오르는 몇 접시 둥그런 사랑의 불꽃!
불이냐 꽃이냐, 청사, 1986
김준태 시인 / 사랑가(歌)
사랑이여 세상의 모오든 사랑의 밑바닥 찌꺼기들이여 하염없이 물결치는 잡풀의 넋이여 내 그대들을 밤낮으로 그리다가 그대들의 가슴에 엎어져 울려 하다가 어깨 끝에 손톱이 길어난 줄도 몰랐어라 손톱이 길게 길어난 줄도 모르고 내 그대들의 가슴에 집을 지으려고 머나먼 산천을 헤매었어라.
참깨를 털면서, 창작과비평사, 1977
김준태 시인 / 산, 산, 산을 바라보면서
바라보고 싶어라 그리하여 목숨하고 싶어라 으깨어져내리는 먹구름들의 아픔 속에서 우리는 엎어져서라도 산, 산, 산이 되고 싶어라 한 방울의 피를 흘리지 않고서도 저러이 무수히 끝없이 푸르름을 피워내고 일으켜 세우는 산, 산, 산의 어깨 가슴들 한 방울의 피, 아 모질도록 찢어지면서도 한 방울의 피를 흘리지 않고서도 저러이 생명의 어우러짐으로 투명하게 타오르는 찬란한 목숨의 목숨의 눈물겨운 산, 산, 산, 그렇다, 개미 한 마리도 다치지 않고 죽이지를 않고서도 언제나 새로이 태어나는 저 하늘 아래 산, 산, 산 넋의 산 우리는 이제 산을 배워야 하리라 풀여치의 날개 하나라도 곱게 펴서 날려보내는 저 여름의 산줄기를 참목숨해야 하리라.
칼과 흙, 문학과지성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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