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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창완 시인 / 인동일기(忍冬日記) 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0.

김창완 시인 / 인동일기(忍冬日記) Ⅰ

 

 

새마을 사업장에 나가 호박구덩일 팠다.

돌자갈 틈 비집고 뻗어 나갈 어린 뿌리 위하여

언 손 부르트니 맨소래담 바르고

내 뼈일는지도 모를 풀뿌리가 혹한 속에 드러나

나도 마른 풀잎 하나로 떨고 선다.

너희들 곁에서 서로의 몸 비비다 바스라지는 가랑잎.

이 가혹한 핍박으로부터 우리가 빠져 나갈

통로라도 뚫듯 파놓은 호박구덩이엔

빨리 온 어둠이 먼저 와서 드러눕고

우리의 하루가 다하자 호루루기 소리 들려

작업이 끝났다. 반장님의 호명에 힘차게 대답하자

작업이 끝났다. 우리 영세민들은

끝없이 뻗어 나갈 호박넌출 붙들고

담장 넘어 지붕 넘어 산을 넘어

다시 각자의 남루 곁으로 되돌아오고 말았지만

몇 됫박의 밀가루 타 들고 돌아오는 길엔

온종일 내 손아귀에서 놀아난 삽

돌담에 기대어 쉬는 밤에도

혼자서 빛을 내는 삽

삽과 같이 걷는 밤길 두려울 것 없었다.

과부로 둔갑한다는 여우가 재주 넘는 고갯길도

무덤 쪼개고 나온다는 처녀 귀신도 무섭지 않았다.

 

인동일기, 창작과비평사, 1978

 

 


 

 

김창완 시인 / 인동일기(忍冬日記) Ⅱ

 

 

눈 오는 날은

부르고 싶은 이름이 너무 많다.

부를수록 반가와서 눈 오는 날은

이름과 이름으로 마주 잡을 손이 없다.

가로수는 잎이 없고

시민들은 목이 없고

 

없음이 없음으로 더 깊이 내통하는

시민들은 멈춰 서서 담뱃불을 건네며

묵시(黙示)로 인화하는 연탄 같은 단어 하나

 

하나 남은 불씨마저 소주 부어 꺼 버리고

골목 안 방뇨(放尿)로써 눈 위에 글씨 쓰는

그를 보았는가?

눈 내리고, 덮이고, 덮여도 남는, 검은

그의 그림자를 보았는가?

 

오늘도 그리운 얼굴이 하나 안 보였지.

소문과 눈발이 어지러운 거리에서

 

어디 갔지요? 그는 어디 있읍니까?

물어 볼 만한 이웃도 없는 동네에서

겨울 만난 우리의 목 없는

어깨와 머리 사이

귓밥까지 쌓이는 눈, 눈 오는 날은

부르고 싶은 이름이 너무 많다.

 

인동일기, 창작과비평사, 1978

 

 


 

 

김창완 시인 / 작은새

 

 

당신은 내 생년월일보다 더 먼 곳에 항상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보다 앞장서서 내 무덤의 봉우릴 넘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었을 때의 꿈을 물어다

거목(巨木)의 아득한 실가지 끝에 둥주릴 짓고

당신은 내 첫울음의 목청을 가다듬어 주었습니다.

 

당신의 잠 속에는 무엇이 있읍니까?

나는 저 산허리에 감기는 밤우뢰의 여운을

당신의 잠 속에 드리우고

떨어져 가던 살별들의 안부를 낚아 내려 합니다.

 

당신이 깨고 나온 알껍질 속에서

지금은 무엇이 부화하고 있읍니까?

나는 내 나이를 담아 놓고 부화하길 기다리며

물 묻은 바람, 날개 돋는 뉘ㅅ살, 아아 겨울 아침의 공복

풀덤불 속에 숨겨 둔 당신의 체온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인동일기, 창작과비평사, 1978

 

 


 

 

김창완 시인 (1942. 7. 19. ~ )

호는 금오(金烏). 전남 신안군 출생. 광주 조선대 국문과 졸업. 1973년 [서울신문] 신춘 문예에 <개화>가 당선되고, 같은 해 [풀과 별]에 <꽃게> 등의 시가 추천되면서 등단함. "반시" 동인. 1980년 [소설문학] 편집장, 1982년 [여원] 편집장, 1989년 [조선일보] 가정조선부장, 1994년 동 기획출판부장 등 역임. 시적 경향은 척박한 현실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의 조용하지만 값진 의미를 친숙하고 서정적인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작품에는 <겨울바다> <인동일기> <소금장수의 재주> < 비평사, 1978)』『우리 오늘 살았다 말하자(실천문학사, 1984) 』 《나는 너에게 별하나 주고 싶다》(자유문고, 20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