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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초혜 시인 / 길은 없어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0.

김초혜 시인 / 길은 없어도

 

 

어제와 똑같지를 않고

그렇다고 전연 딴 사람도 아닌

소녀가

하늘에 로프를 매고

서커스를 한다

 

달려라 매달려라

밤을 멎게 하라

늘어진 심장에

풍선을 달아 다오

왼통 잡념이사

떠나가거라

 

무지개가

외도(外道)를 한 하늘에

사슴 모가지를 흉내내는

소녀야

기도는 조금도

가까와지지 않는다

 

구리빛 허공에

장미꽃을 던진대도

이미 쾌락에서

차단된 지 오래다

 

지금

길은 없다.

 

떠돌이 별, 현대문학사, 1984

 

 


 

 

김초혜 시인 / 눈

 

 

눈 오는 구석에 홀로 서

눈과 함께 녹아

그대 가슴에 내 모습을

새기고 싶다

 

눈발이 온 천지에 들듯

그대 부신 눈빛

온 마음에 들어와

 

이 마음의

고요를

휘젓고 가고

 

그리움은 갑절로 커져

빈 가슴에

되살아 오는

눈 온 날

 

스쳐가는 바람 속에

잊을 수는 있대도

내가 소생할 데는

잃어진 당신이다.

 

떠돌이 별, 현대문학사, 1984

 

 


 

 

김초혜 시인 / 문둥북춤 1

 

 

덩기덕 덩더 더러러

덩―덩 덩더 쿵―더

 

사랑이 되지 않는

살을 가지고

달래어도 멀어지지 않는

거부의 몸

 

감각이 식어간

팔과 다리는

있는지 있었는지

뭉클리어 오그라들고

 

울고 있는 서로가

우는 것인지도 모르게

닳아진 그림자는

헐렁거리고

 

자는 살을 다시 데워

첫자리로 되돌려 달라고

신시(神市)를 향해

살풀이를 합니다.

 

떠돌이별, 현대문학사, 1984

 

 


 

 

김초혜 시인 / 문둥북춤 2

 

 

눈물이 생겨나는 구덕만

크게 파 놓고

햇살은 모질게도

살점 몇 개를

더 휩쓸어 갔다

 

시간은 살 속으로

비집고 들어

얼굴의 윤곽을

녹이려 하고

달과 이슬도

독이 되어

나를 호리고 마는구나

 

바람과 맞서도 부서지는

번갯불이 스쳐간 몸뚱이

아픔도 즐거움이던 때를

되돌리라고

허물어져도

얼어붙은 불꽃

타오르고 싶다

신의 지팡이를 다오.

 

떠돌이별, 현대문학사, 1984

 

 


 

 

김초혜 시인 / 문둥북춤 5

 

 

덩기덕 덩더 더러러

살이 썩어가는 냄새를 맡게 해다오

덩―덩 덩더 쿵―더

 

덩기덕 덩더 더러러

형틀에 못박힌 모습이

덩―덩 덩더 쿵―더

눈을 감으면 눈시울 속에 있네

 

덩기덕 덩더 더러러

꿈은 인광(燐光)처럼 얼고

덩―덩 덩더 쿵―더

죄업의 의미를 깨버리지 못하네

 

덩기덕 덩더 더러러

잊음과 고통이

덩―덩 덩더 쿵―더

주렁주렁 달린

설움을 달래듯

아직도 울 수는 있다네

 

덩기덕 덩더 더러러

새빨간 피 한 움큼 나오지 않는

살을 가졌대도

덩덩―덩더―쿵더

푸른색은 푸르게 보이고

덩기덕 덩더 더러러

빨간색은 빨갛게 보이는

눈만은 아직도 꽃밭이라네

눈만은 지금도 눈물밭이라네.

 

떠돌이별, 현대문학사, 1984

 

 


 

김초혜 시인 ((金初蕙) 1943 ~ )

소설가 조정래씨의 부인으로 1943년 9월 4일, 서울 출생. 청주여고.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64년 현대문학 '길' 등단. 2008 제20회 정지용문학상. 1985 제18회 한국시인협회상. 1984 제21회 한국문학상 수상. 한국현대시박물관 관장. 한국여류문학회 이사. 가정법원 조정위원. 한국문학 편집장 역임. 시집으로 《떠돌이 별》,《사랑굿 1》,《사랑굿 2》,《사랑굿 3》,《세상살이》 등이 있으며, 소설가 조정래 작가와 부부 사이다. 월간 한국문학 편집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