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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시인 / 행복(幸福)
새와 나, 겨울나무와 나, 저문 날의 만설(滿雪)과 나, 내가 새를 사랑하면 새는 행복할까 나무를 사랑하면 나무는 행복할까 눈은 행복할까
새는 새와 사랑하고 나무는 나무와 사랑하며 눈송이의 오누이도 서로 사랑한다면 정녕 행복하리라
그렇듯이 상한 마음 갈피갈피 속살에 품어주며 그대와 나도 사랑한다면 문득 하느님의 손풍금소리를 들을지 몰라 보석(寶石)의 귀를 가질지 몰라
빛과 고요, 서문당, 1982
김남조 시인 / 허(虛)
……어둡다 내 영혼이 등불을 껐을까
천 길 물 밑의 벗은 가슴은 얼고 얼어 유리(琉璃)가 되었을까
눈물도 많으면 바위까지 뚫는데 가난한 나는 눈물도 사랑도 너무 적었을까
말은 가지 끝의 잎새 생각만이 병(病)으로 깊어져 묵언(黙言)의 밀밭 되고
사람을 구(救)하느라 죽으신 야훼의 그 아드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내 마음의 방(房)들이 잠기고 열쇠를 잃었으니 할 일도 없네
할 일도 없네
김남조 시전집, 서문당, 1983
김남조 시인 / 화답
고요하여라 어린 초목들 위에 엉기는 이슬, 만상에 향유 입히는 햇빛, 안개와 아지랑이, 비단실 솔솔 푸는 바람도 아무 말 없어라
다만 고요하여라 천둥 소리도 하나 없이 마음이 문을 열고 영혼과 영혼 사이 왕래의 길을 트느니
진실로 한 탄생에마다 아득한 날 이름과 축복을 예비하신 분께서 무량으로 생수를 따르심이로다 고통에조차 단맛을 섞으시며 귀하게 조율하심이로다
고요하여라 소리내는 순서들은 저만치 지나가고 느낌과 뜻과 대답으로 간절한 침묵뿐이로다
빛과 고요, 서문당, 1982
김남조 시인 / 후조(候鳥)
당신을 나의 누구라고 말하리 나를 누구라고 당신은 말하리 마주 불러볼 정다운 이름도 없이 잠시 만난 우리 오랜 이별 앞에 섰다
갓 추수를 해들인 허허로운 밭이랑에 노을을 등진 긴 그림자 모양 외로이 당신을 생각해 온 이 한 철
삶의 백 가지 간난을 견딘다 해도 못내 이것만은 두려워했음이라 눈 멀듯 보고지운 마음 신의 보태심 없는 그리움의 벌(罰)이여 이 타는 듯한 갈망
당신을 나의 누구라고 말하리 나를 누구라고 당신은 말하리
우리 다같이 늙어진 어느 훗날에 그 전날 잠시 창문에서 울던 어여쁘디 어여쁜 후조라고나 할까
옛날 그 옛날에 이러한 사람이 있었더니라 애뜯는 한 마음이 있었더니라 이렇게 죄 없는 얘기거리라도 될까
우리들 이제 오랜 이별 앞에 섰다
정념의 기, 정양사, 1960
김남조(金南祚) 시인은?
시인·수필가. 1927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규슈[九州]에서 여학교를 마치고,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마산고등학교·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성균관대학교 강사를 거쳐 1954년부터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사범대학 재학 때인 1950년 <연합신문>에 <성숙>·<잔상(殘像)>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첫 시집 <목숨>(1953)에서는 인간성의 긍정과 생명의 연소(燃燒)를 바탕으로 한 정열을 읊었으며, 제2시집 <나아드의 향유>(1955)에서부터 종교적 사랑과 윤리를 읊었다.
인간성에 대한 확신과 왕성한 생명력을 통한 정열의 구현을 그려내고자 했던 그녀의 첫 시집 <목숨>은 가톨릭 계율의 경건성과 뜨거운 인간적 목소리가 조화된 시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작품집 속에 이러한 세계관에서 점차 종교적 신념이 한층 더 강조되어, 짙은 기독교적 정조와 더욱 심화된 종교적 신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예술원 회원 시집 <목숨> <나아드의 향유> <나무와 바람(1958)> <정념의 기(旗)(1960)><영혼과 빵>(1973) <풍림의 음악> <겨울 바다> <설일> <사랑초서> <빛과 고요> <김대건 신부> <동행> <바람 세례> <평안을 위하여> <희망학습> 그리고 지금까지 출간된 시집을 묶은 <김남조 시전집(1983)><너를 위하여>(1985)· <깨어나 주소서 주여>(1988)· <끝나는 고통 끝이 없는 사랑>(1990)이 있으며, 수상집 다수 및 콩트집 <아름다운 사람들> 등을 펴냈다.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958년 시집 <나무와 바람>으로 자유문협문학상, 1963년 시집 <풍림의 음악>으로 오월문예상, 1975년 시집 <사랑의 초서>로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았고, 1984년 서울특별시문화상,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국민훈장 모란장, 은관문화훈장, 만해대상 등 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수필집으로 <다함없는 빛과 노래>(1971)·<기억하라 아침의 약속을>(1987)·<그대 사랑 앞에>(1987)·<그가 네 영혼을 부르거든>(198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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