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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시인 / 산중가(山中歌)
산골의 고(高)영감네 집은 가마득하다네 처마 밑에 고사리 다발이 걸려 있고 부엌엔 갈치 두 마리 먹음직하게 매달려 있고 마당귀에 돼지 오줌을 엎지른 두엄이 쌓여 있고 헛간엔 어제 만든 싸리비가 세워져 있고 뒷 울안에 감나무잎이 바람을 말아올려 소곤거리고 변소간의 망태엔 종이 아닌 지푸라기가 들어 있고 여덟자 정도의 방엔 풍년초 한 봉이 놓여 있고 식구란 고(高)영감과 그의 늙어빠진 아내뿐이고 책 한 권도 먼지 묻은 족보도 없지만 밤마다 산딸기 소롯소롯 배인 빨간 꿈속마다 여순 반란 사건 때 죽은 아들이 울고 오나니 가득한 집안을 참쑥냄새의 울음으로 텅 비우고 가나니 꼭 핏줄을 이을 아들 하나 남기고자 피마자기름을 머리에 바르고 빗질을 한다네 고(高)영감은 곰보인 젊은 과부를 홀리기 위하여.
참깨를 털면서, 창작과비평사, 1977
김준태 시인 / 삽
농부의 손에 가면 농구(農具)로 쓰이지만 무덤지기의 손에 가면 무덤만을 파며 닳아진다.
칼과 흙, 문학과지성사, 1989
김준태 시인 / 새 -1-
뻘 흥건한 바닷가 갈대밭 속서 이름 모를 새들이 깊거나 높게 그네 달린 바람을 타며 운다
거리를 두고 울까 입을 벌리고 울까 얼마동안 울까
슬그머니 살짜기 기어들어가 자꾸 갈대를 헤쳐도 새들은 터럭조차 안 보인다
등 뒤에까지 뻗은 뭍의 희미한 달구지 길 미루나무 푸른 가지마다 노을이 새어든다 죽은 낱말을 빠져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이웃 몰래 없어지듯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는 새여 약하나 이상하게 영리한 새여 살고 싶어 숨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우는 기술인가
언제부터 나는 너희들을 보려고 했는가 아버지보다 먼저 보고 싶어 했는가
무서워라 무서워라 새들이 날아 올라도 땅에선 풀잎사귀 하나 날지 않고
갈대는 사람과 떨어져서 흔들린다.
참깨를 털면서, 창작과비평사, 1977
김준태 시인 / 새 -2-
새는 가슴에 칼을 품지 않아 하늘을 높이 날고
인간은 가슴 구석에 칼을 넣고 다니므로 땅 위에서 칼과 함께 피를 흘리고 칼과 함께 녹이 슬어 부러진다
……새새새새새새새새새
새는 죽어 하늘에 허공을 남기지만 인간은 죽어 땅 위에 눈물을 남긴다 그 어떤 칼날로도 무너뜨리거나 베어 버릴 수 없는 눈물의 투명한 빛깔과 따스함을 남긴다.
국밥과 희망, 풀빛, 1984
김준태 시인 / 쇄인봉 가는 길
무슨 그리움이 저리도 많이 있을까 무슨 그리움이 저리도 많아 쇄인봉 가는 길에 아아, 우리가 가는 길에 나무와 나무들이 돌멩이와 돌멩이들이 산울림과 산울림들이 서로 입맞추고 싶어
눈발이 가득 내리치는 이 겨울 비탈길 얼음 위에서도 서로 부둥켜 안고 몸을 부비는지 바라보면 아름다워라 울어 주고 싶도록 아름다워라.
국밥과 희망, 풀빛,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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