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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혜천 시인 / 걸어가는 사람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1.

김혜천 시인 / 걸어가는 사람

 

 

더러는 휘어지고

더러는 꺾인 겨울 연밭

얼키설키 몸을 포갠 적요를 바라보며

연상되는 자코메티 전

 

뼈대만 남은 앙상한 몸

비정상적인 커다란 발

성난 듯 허망한 듯

어딘가를 바라보는 강렬한 시선

쓰러질 듯 위태롭게 걸어가는 사람

 

살을 다 발라낸 생선 가시처럼

빈한한 실존 앞에 명치 끝이 아프다

 

살아있다는 것은 직립을 포기하지 않는 것

걸어간다는 것은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

바라본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

 

존재는 이 모든 것을 버렸을 때

다다를 수 있는 정수(精髓) 아닌가

 

소멸 이후 어둠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두렵지만

군더더기 없는 깡마른 몸으로

너머의 세계를 응시하면서 성큼성큼 걸어간다

 

생은 직진이니까

 

계간 『예술가』 2019년 가을호 발표

 

 


 

김혜천 시인

서울에서 출생. 2015년 월간 《시문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윤동주서시문학상 제전위원,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