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 시인 / 시장(市場)에 서면
거울을 파는 사람이 되고 싶어라 저 하늘 같은 거울을 팔고 싶어라 여기 시장에 서면 나는, 먼 원시의 동혈(洞穴) 속 포효(咆哮)를 닮은 군상(群像)들의 표정은 가파른 천길 낭떠러지를 굽어 보고 비로소 살아야겠다는 숨찬 결의의 서슬찬 그 우러름이 정녕 슬픈 일인가, 한 점 아쉬움 없이 흐르는 연연한 강마을에 서서 아예 사슴 같은 서정이사 팽개쳐 버린 우리 모두들.
언제런가 한번은 눈물겨웁게 저마다의 가장 안에서 번져 오를 그리운, 그리운 하늘은 없는가.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황명 시인 / 아침을 향할 때
밤은, 흐르는 밤은 강물처럼
흐르는 은하(銀河) 속에 죽어가고, 빛나는 어제와 내일을 위하여 슬기로운 꽃은 지는가, 피는가
잿빛의 기억들은 한 그루 나목(裸木)처럼
쉬지 않는 호흡의 심연(深淵)
밤은 어느 낯선 골짜기에서 오히려 서성이는 병사(兵士)의 눈빛.
아직도 시간(時間)만 있으면 자유(自由)는 있을까
아침을 향할 때 나의 노래여.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황명 시인 / 악수
한 마리 푸른 새가 날다 죽어간 자리,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풀밭. 증조할아버지 무덤만큼이나 소홀했던 지난 날 너와 나의 어김새를 어찌할 거나.
한번은 낙동강이 온통 피로 흘렀고 한번은 압록강이 그렇게 흘렀지 그래, 그 긴 뱃길들이 막혔었지. 그때 우리는 피와 마늘 맛을 처음 알고 눈물을 한없이 흘렸지.
한번쯤은 그런 철없던 때도 있었거니 그것은 고약한 회오리 바람이 유월달 먹구름을 휘몰아 왔던 게지.
오늘은 벌써 입추가 지난 팔월 하순, 산비둘기가 콩밭을 찾기엔 좋은 날씨군. 참, 이런 날엔 우리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저 할아버지의 손때 어린 들판이나 구경하러 가세.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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