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 시인 / 상황(狀況)Ⅰ
아득한 날에 말이 있었고 아득한 날에 흐름은 있었다지만 사람이 그리워하는 것은 아예 하늘도 땅도 해도 달도 아닌 스스로의 눈과 입과 그리고 귀가 달린 머리와 그리고 둑이 없는 질펀한 자유(自由) 그래서 얼마든지 출렁여도 좋을 서로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눈을 감을 때 나는 비로소 종교의 의미를 깨닫고 너무도 무료(無聊)한 긴 시간에서 입을 열면 세상은 온통 먼지와 소리와…… 그 시끄러운 잔치 때문에 머리는 돌아서 식어가는데 동(東) 서(西) 남(南) 북(北)의 어느 지표(指標)는 다가와도 왠지 허전한 가슴 때문에 지금 나의 손 손은 자꾸만 떨린다.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황명 시인 / 세상은 뜻밖에
눈부신 아침에 길을 떠나는 사람아, 세상을 너무 가볍게 보고 그렇게 가벼운 옷차림으로 떠나지 마오 세상은 정녕 뜻밖에 무거울지도 모르니
노을진 저녁에 길을 떠나는 사람아, 세상을 너무 무겁게 보고 그렇게 무거운 옷차림으로 떠나지 마오 세상은 정녕 뜻밖에 가벼울지도 모르니.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황명 시인 / 소리가 일어서는 아침에
소리가 일어서는 아침에 잃었던 모든 것이 제 자리에 모인다. 이제 시장(市場)에서 잃었던 그 목소리들이 다시금 서로 만나게 되는 시간 꽃가루를 나르는 저 벌떼들은 지금 또다시 그들의 꽃밭으로 가야 하고, 노래를 전공하는 나의 막내딸은 여전히 피아노 앞에서 흥얼거리고, 그림을 그린다는 앞집 사내는 햇살을 가슴에 안고 하품을 하는데, 집, 알량한 집을 지키는 우리집 수캐는 목줄이 답답해서 길게 기지개를 켠다. 소리가 일어서는 아침에.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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