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란 시인 / 꽃씨
가을날 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를 묻는다.
문병란시집, 삼광출판사, 1971
문병란 시인 / 나그네
먼 길 헤매다 몇해만에 돌아와 보니 사람들 얼굴 바뀌어졌네.
아는 얼굴들 어디론가 사라져가고 내 자리엔 다른 얼굴이 은은히 웃네.
나는 어느 하늘가로 떠돌아 왔는가 나는 어느 별 아래로 헤매어 왔는가
빈손 가지고 떠났다가 빈손 가지고 돌아와 오늘은 얼굴을 반쯤 가리네 살며시 돌아서 찡긋이 한 눈을 감네.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
문병란 시인 / 대위법 5
눈보라가 지동치는 깊은 겨울 내가 천은사 승방 따뜻한 아랫목에서 번뇌를 소재로 한 한 편의 연가를 쓰고 있을 때
천은사 아래 땜 공사장에선 눈보라 속에서 크레인이 울고 불도저가 윙윙거렸다.
내가 승방에 누워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시베리우스의 핀란디아를 들으며 한잔의 커피를 들고 있을 때
공사장의 인부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광의면 주조장에서 실어 온 찬 막걸리를 벌떡벌떡 마시고 수로를 만드는 골짜기에선 다이나마이트가 처절히 울었다.
나는 하루 쉬어도 봉급이 나오는데 그들은 하루 쉬면 굶어야 한다 누가 노동은 신성하다고 말하는가? 눈보라는 거세어지고 지리산이 웅웅대며 몸부림친다
산문(山門)에 기대어 그리움을 노래하기엔 부끄럽구나 백팔번뇌를 찾고 선(禪)을 말하고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고 승방의 독신이 외롭다 말하기엔 부끄럽구나
눈보라는 거세어지고 크레인도 크게 운다 작열하는 다이나마이트 무너져 가는 바윗돌 내 가슴은 뜨거워져 간다 아 이런 날 부처님도 절을 지키기엔 민망하겠구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죽순밭에서, 인학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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