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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문병란 시인 / 법성포 여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3.

문병란 시인 / 법성포 여자

 

 

마이가리에 묶여서

인생을

마이가리로 사는 여자

 

주막집 목로판에 새겨온 이력서는

그래도 화려한 추억

항구마다 두고 온 미련이 있어

바다 갈매기만도 못한 팔자에

부질없는 맹세만 빈 보따리로 남았구나.

 

우리 님 속 울린

빈 소주병만 쌓여 가고

만선 소식 감감한

칠산 바다 조기떼 따라간 님

법성포 뱃사공은 영 돌아오지 않네.

 

어느 뭍에서 밀려온 여자

경상도 말씨가 물기에 젖는데

알뜰한 순정도 아니면서

집 없는 옮살이 바닷제비

서쪽 하늘만 바라보다

섬 동백처럼 타 버린 여자야

 

오늘도 하루 해

기다리다 지친 반나절

소주병을 세 번 비워도

가치놀 넘어서 돌아올 뱃사공

그 님의 소식은 감감하구나.

 

진상품 조기는 간 곳 없고

일본배 중공배 설치는 바다에

허탕친 우리 님,

빈 배 저어 돌아올

굵은 팔뚝 생각하면 울음이 솟네.

진종일 설레는 바람아

하 그리 밤은 긴데

축축히 묻어오는 눈물

여인숙 창가에 서서

미친 바다를 보네

출렁이는 우리들의 설움을 보네.

 

뱃길도 막히고 소식도 끊기고

징징 온종일 우는 바다

니나노 니나노

아무리 젓가락을 두들겨보아도

얼얼한 가슴은 풀리지 않네.

 

용왕님도 나라님도 우리 편 아니고

조기떼도 갈치떼도 우리 편 아니고

밀물이 들어오면 어이할거나

궂은비 내리면 어이할거나.

 

오 답답한 가슴 못 오실 님

수상한 갈매기만 울어

미친 파도를 안고

회오리 바람으로 살아온 여자

만선이 되고 싶은 밤마다

텅 빈 법성포 여자의 몸뚱이도

미친 바다처럼 출렁이고 있구나.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

 

 


 

 

문병란 시인 / 시(詩)

 

 

한 그루 나무와 같이

묵묵히 서 있는 저녁의 기도가 아니다.

 

한밤중 뜨는 달처럼

그렇게 어설프지 않고

푸른 과수원에 넘치는 향기처럼

그렇게 황홀히 젖는 달빛이 아니다.

 

단단히 쥐어진 주먹

뜨겁게 부딪치는 찰나에 꽃피는 아픔,

벌떡벌떡 숨쉬는 허파 속에 있고

추리고 추린 오늘의 동사(動詞),

온몸으로 으깨리는 눈물 속에 있다.

 

부드러움 속엔 이미 부드러움이 없고

사랑의 속삭임 속엔 이미 사랑이 없다.

언어는 손가락 새로 빠져나가는 새하얀 달빛

시(詩)는 이미 시(詩) 속에 없고,

 

손끝에 닿으면 타버리는 한줄기 불꽃

재 속에서 추리는 마지막 사리(舍利)이다.

 

시(詩)는 가을 하늘에 떠도는 조각구름

강물에 비치는 후조(侯鳥)의 날개가 아니라

시(詩)는 때묻은 발바닥

모독당한 오늘의 양심에 있고

 

맹물이 아닌

우리들의 뜨거운 눈물,

한방울 이슬이 아닌

우리들의 뜨거운 피를 마시고 피는

모진 장미의 까시

콕콕 찌르는 분노에 있다.

 

우리들의 시(詩)는 이미 쫓겨난 왕자,

한밤에 부르는 세레나데가 아니고

허리가 꺾인 코스모스

창백한 백합의 흐느낌이 아니다.

 

엉겅퀴처럼 억세게

들찔레처럼 어기차게

칡덩굴처럼 쭉쭉 뻗어

뽑혀도 뽑혀도 다시 살아나는 뿌리에 있다.

 

아직도 낡은 연미복을 입은 시인아

이제는 시들은 꽃다발은 던져버려야 한다

가냘픈 피리는 내던져버려야 한다

시(詩)는 시(詩)가 끝나는 데서부터 다시 시작돼야 한다.

 

아직도 한밤중

흉중에 뜨는 명월(明月)을 안고

아쉽게 매아미 껍질을 어루만지는 손아

황홀히 보석을 들여다보는 공허한 눈아

언어를 사랑할 때

언어는 이미 연금술사의 마술

증발한 맹물 속에 시(詩)는 없다.

 

시인아!

시(詩)를 버려라, 연연한 마음 속에

이미 시는 없고

부드러운 혀끝에 박힌 까시,

천년의 여의주(如意珠)는 깨어졌다.

 

보다 뜨거운 가슴을 위하여

보다 피아픈 운율을 위하여

시인아 시(詩)를 버려라

시인아 시(詩)를 배반하여라

 

그대 교과서 속에서

그대 애인의 눈동자 속에서

진정 그대 시집 속에서

죽어가는 시(詩)의 껍질을 버리고

정수리를 퉁기는 까시가 되라

복판으로 날아가는 창끝이 되라.

 

죽순밭에서, 인학사, 1977

 

 


 

문병란(文炳蘭, 1935년~2015년) 시인

전라남도 화순 출생. 호는 서은(瑞隱). 1961년에 조선대학교 문학과를 졸업. 1962년 《현대문학》에 김현승 시인이 3회 추천 완료하여 문단에 나옴. 1988년에 조선대학교 국문과 조교수에 임용되었다가 2000년에 교수가 되었으며, 현재 명예교수.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1996년 5.18기념재단 이사를 역임했다. 1979년 전남문학상을 시작으로 하여 요산문학상, 금호예술상, 광주문화예술상, 한림문학상, 박인환 시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